운 좋게도 결혼을 하자마자 나는 국가교육기관의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
월급이 많진 않아도 의미 있는 일이고, 나의 경력에 많은 도움이 되는 일이어서 정말 기뻤다.
그러나 결혼 전 전셋집을 구할 돈이 없어 고민하던 중 다시 한번 친정아버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당시 삼천만 원 정도가 필요한데, 그 보증인을 아버지께서 기꺼이 해주셔서 우리는 서울 외곽 10평 정도의 작은 아파트 전세를 얻을 수 있었다.
집들이를 해야 하는데, 엄마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으셔서 전혀 도움을 주지 않으셨고, 내 요리실력으로 15인분 의국 동료들의 상을 준비했다. 심지어 엄마는 친정 식구들과의 집들이에도 오지 않으셨지만, 난 서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에게도 화가 풀리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7년 내내 말썽 한번 안 피우고, 성실하고 독립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현명하게 꾸려가던 딸이 말도 안 되는 욕과 협박을 들으며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감행했으니 얼마나 화가 나셨을까? 나라도 그랬을 거다.
집들이를 온 사람들은 우리의 빈한한 살림을 보고 선물들을 해주었다. 신발장도 없던 집이어서 신들을 종이 박스에 넣어놓은 것을 보고 X의 의국 동기들이 신발장을 사주고 내 동기들이 식탁을 사주었다.
비난한 살림이었지만, 돈이 생기면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마련하면서 나름 재미있었다. 당시 레지던트의 월급만으로는 어려웠기에 내가 연구원으로 일하고 일주일에 2일 정도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어머니가 내야 할 은행 대출이자를 갚아가면서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 힘든 건 시어머니의 호통과 욕지거리였다. 매일 안부전화를 하라고 하면서 살림살이에 대한 호통과 은행대출 이자를 나에게 갚으라는 협박과 욕지거리는 계속되었다. 본인 대출에 대한 이자를 대신 갚고 있는 우리에게 미안함은 전혀 없었다.
그즈음 나는 큰아이를 임신했는데 입덧이 심해서 제대로 음식을 먹질 못해서 전철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며칠을 쉬고 출근을 했고 너무 힘들어서 친정집으로 갔다. 그때 X는 전문의 공부를 하려고 모 병원의 의사들과 함께 공부하고 늦게 오니 걱정 말라고 했다.
친정집에서 자고 있는데, 밖에 계시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너 지금 쇼파에 앉아라. 그리고 엄마 얘기 잘 들어. TV 틀어봐. 성수대교가 무너졌단다. 이서방이 성수대교로 국립도서관으로 공부하러 다닌다면서... 프라이드 한 대가 떠내려갔다고 하는데, 곧 아버지가 데리러 갈 테니 진정하고 같이 확인하러 갈 준비하고 있어.”
나는 소파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게 현실인가 싶기도 하고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삐삐를 쳐 봤지만 답이 없었다. 손발이 떨리고 가슴이 벌렁거리니 뱃속에 아이마저 움직임이 없이 굳어버렸다.
아버지 차를 타고 성수대교에 가는 길은 너무도 막혀서 가기도 쉽지 않았고, 라디오에서는 성수대교 주변을 제한하고 있으니 우회하라는 말에 방향을 바꿔서 국립도서관으로 갔다. X의 프라이드가 주차장에 있는 걸 확인하고 여러 열람실을 뒤졌다. 저 멀리 보이는 X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달려갔다.
“자기야~ 엉엉엉....”
배부른 여자가 남자에게 달려가 우는 모습에 주변의 사람들은 놀라서 쳐다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성수대교가 무너졌대. 자기가 그 시간에 성수대교로 다니잖아. 프라이드 한 대가 떠내려갔다고 하고, 삐삐도 안 받아서 난 너무 놀래고 가슴이 떨려서 혼났어! 너무 놀랬어”
“괜찮아. 괜찮아. 난 오늘은 동호대교로 와서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어. 삐삐도 꺼놔서...”
X의 생사를 확인하고 출근을 했다. 주변에서는 X의 생사를 확인하고 위로해 주었는데, 옆 연구실의 선생님의 부인이 버스에 탔다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운명이라는게 참 재밌는 장난꾸러기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가 사라졌다면..... 뱃속의 아기(희원) 와 난 지금 어떤 모습 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