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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사 Mar 10. 2024

기차역에 주저앉은 임산부

 

전문의 시험이 끝나고 X는 군의학교로 입대를 앞두고 하루 전날 나에게 종이 한 장을 주었다.


생명 보험증서였다.


지난해 훈련하던 군의관 한 명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본인이 워낙 뚱뚱하기 때문에 자기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들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생명보험금으로 아이와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설명이었다.

난 엉엉 울며, 이게 무슨 유서냐고 왜 그런 생각을 하냐고 했다. 사실 내가 무서운 것은 그것보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의 전화폭력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 X가 시어머니에게 괴롭히지 말라고 했고 훈련 중 돌아오는 대출금-X의 이름으로 시어머니가 대출을 받아서 쓴 돈- 상환도 확인했으니 염려 말라했다.     


그런데 어이없는 것은 X의 입대 다음날 시아버지가 환갑잔치를 한다는 것이다. 아들이 없는데 자신의 친구들이 올 수 있는 날로 잡아서 본가로 내려가서 X는 입대하고 나는 남아서 환갑잔치를 준비해야 했다.


입대하는 날 기차역으로  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마음은 아팠지만 곧 볼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그런데 기차에 타고 떠나는 X의 뒷모습을 보니 울음이 터져버렸고 기차를 쫓아 뛰어가다가 주저앉아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X는 내 전부였고 나는 X를 많이 사랑했다.


리고 그가 없는 그곳과 연락도 안 되는 X 없이 시부모의 학대를 버텨야 한다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그때 주변에 계시던 한 아주머니가 나를 일으켜 주시면서 괜찮을 테니 너무 걱정 말라고 배 속에 아기가 힘들겠다고 달래며 일으켜 주셨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X도 기차칸 맨뒤까지 오면서 울면서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보니 그때도 X는 상간녀 김경아와 연락을 하고 김경아가 면접을 보러 가는 걸 차로 데려다주었단다. 김경아의 그림자는 28년 우리의 모든 결혼생활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겨우겨우 아들이 없는 이상한 환갑잔치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나에게는 이제  큰 선택의 문제가 있었다. 지금의 직장을 그만두고 X와 함께 발령지로 갈 것인가, 남아서 일을 지속하고 친정에서 아이를 키울 것인가이다.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X가 남겨 준 퇴직금과 나의 퇴직금으로 3개월을 버티고 함께 발령지로 가기로 정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갚기로 한 대출 상환금을 갚지 않자 은행에서 나에게 매일 전화가 왔다. 시어머니가 아들 이름으로 카드를 만들고, 대출을 받았기 때문에 채무자는 X였다. 매일 오는 은행의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너무도 힘든데, X에게 연락도 할 수 없었다. 무섭고 억울한 시간이 지날수록 임산부인 나는 너무 힘들어졌고, 할 수 없이  나와 X의 퇴직금을 끌어모아 상환금의 일부를 갚았다.


그래서 돈이 너무 없어서  뱃속에 아이가 있는 나는 하루에 천 원밖에 쓸 수 없었다. 매일 슈퍼에 가서 700원짜리 건전지와 300원짜리 우유를 샀다. 그 당시 낮에 tv를 하지 않아서 낮에는 아버지가 주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들으며 견뎠고 뱃속 아이를 생각해서 좋은 음식은 먹을 상황이 안되니 우유라도 마시려고 한 것이다.

이도 힘들면 친정집에 아무도 없을 시간에 가서 반찬들을 몰래 담아서 와서 먹었다. 엄마가 알면 속상하실게 뻔하니 대놓고 가져오기도 미안했던 것이다.      


내가 X의 발령지도 함께 가겠다는 말에 선임연구원인 선배는 다시 생각해 보라고 충고했다. 이만큼 좋은 자리가 없고 앞으로 더욱 환경이 좋아질 것이라서 지금의 결정은 너무 바보 같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바보였고 겁에 질린 상태여서 X만이 나의 동아줄이라고 생각했고, 그 좋은 연구원 자리를 포기하는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 하지만 나 혼자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의 구박과 학대를 혼자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X가 훈련 도중 포상휴가를 나와도 나는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섰다. 왜냐면 우리가 가진 돈이 너무 없어서 명동 전기구이 통닭집에 가서 반마리와 수프와 빵을 시켜서 나눠먹었다. 혼자서 통닭을 한 마리는 거뜬히 먹는 X에게 그날 우리는 너무도 배고픈 저녁을 먹었다. 게다가 부대로 돌아갈 차비가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있던 퇴직금은 모두 시어머니의 빚 일부를 갚는데 쓴 상태에서 한 푼이 아까운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친정 엄마가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주신 용돈을 모아서 X에게 주었다. 내 통장엔 정말 몇 천 원 밖에 없는  거지상태였지만, 걱정할 X를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그게 X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방법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난 지금도 내가 X를 순수하게 사랑했고, 그래서 그런 지옥 같은 결혼을 버텼고, 두 아들을 낳은 것을 후회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모든 것을 믿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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