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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사 Mar 11. 2024

몸과 마음이 추운 강원도



군의학교 과정을 마치고 X는 강원도 전방으로 배치를 받았다. 나는 이미 좋은 직장을 버리고 X를 쫓아가는 바보 같은 선택을 한 후였기에 이사준비를 시작했다.


아파트 전세금을 빼서 은행 빚을 갚고, 이삿짐센터에 예약을 하고 관사에서 사용할 가구를 사기 위해 사당동 중고시장을 뒤졌다. 그렇지만 그 중고가구마저도 내겐 호사스러운 것이었고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에 재활용 쓰레기장에 버리려고 놔둔 소파와 의자를 보고 너무나 기뻤다. 임신 7개월의 몸으로 그 큰 가구를 옮기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서 이리저리 낑낑거리고 있었더니 고맙게도 지나가던 학생들이 나를 도와줘서 집에 옮겨 두었다.


그런데 그날부터 살살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엄마의 안부 전화에 배가 좀 아프다고 하니까, 놀라시면서 빨리 병원을 가라고 하셨다.

살살 아픈 배를 끌어안고 전철을 타고 병원에 들어가서 진료를 보니, 조기출산이 염려되므로 바로 입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X가 일주일 후에 제대를 하고 병원으로 왔다. 나는 앞으로도 2주간 꼼짝하지 못한 채로 입원해서 누워있어야 하는데, 이사는 바로 다음 주였다. 주치의 선생님은 절대 퇴원할 수 없다고 하셨고 X는 혼자 이사를 해야 했다.



이사를 하면서 X는 시어머니와 엄청난 싸움을 했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전세금 3000만 원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걸 은행에 상환해야 하는데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퇴원을 해서 간 군관사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625 시절에 군인들이 지은 집이었다. 안방과 거실, 작은 창고방과 화장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방 이외에는 난방이 되지 않았고 기름보일러라서 겨울이면 난방비를 엄청나게 지출해야 했고, 가장 큰 문제는 물이었다.


상수도관이 너무 오래돼서 시뻘건 녹물이 뻔뻔하고 당당하게 주방과 화장실에 나왔다. 그래서 다른 집들은 생수를 배달해 먹었지만 우린 그런 여유가 없어서 일주일에 2~3번씩 약수터에 가서 물이 받아와야 했다.


한 달이 지나고 임신 9개월이 되었을 때 , 다음날 친정으로 가서 출산때까지 있을 생각에 주변 이웃들에게 인사를 하고 집에 들어와서 세수를 하는데, 양수가 터져 버렸다.

자고 있던 X를 깨워서 빨리 병원에 가야겠다고 했다. 당황한 X는 새 옷을 갈아입고 벨트도 매지 않은 채, 택시를 불렀다. 나는 그 사이 가스와 창문을 잠그고 지갑과 돈을 챙기고 아기를 위해 엄마가 준비해 주신 신생아용품 가방을 챙겼다. X는 이미 택시에 앉아서 허둥대고 있었고 그렇게 6월 초 어느 날 나는 택시를 타고 서울의 병원으로 향했다. 새벽이고 택시 운전사가 내가 양수가 터져서 빨리 병원 가야 한다는 소리에 차에서 아이를 낳을까 봐 걱정하면서 최고 속도로 달렸다. X는 옷만 갈아입고, 벨트, 지갑, 신분증 등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왔다    


진통이 시작되고 하루가 지나도 아기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출산 유도제를 맞고 오랜 시간 동안의 진통을 통해 자연분만으로 희원이를 낳았다. 딸만 셋이었던 아버지는 손자를 보시면서 너무 기뻐하셨고 백화점에 가셔서 여기서 제일 좋은 미역을 달라고 하셨단다.


그러나 진통에 지친 아기가  태변을 내 안에 놓고 나와서 나는 그날부터 열이 39도~40도를 오르내리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많이 아팠다. 그래도 부풀어 오르는 젖을 아기에게 먹이고 싶어서 신생아실로 갔다. 출산을 하면서 기절을 한 나는 아기의 얼굴을 그렇게 처음 보게 되었다. 너무 이쁘고 토실토실한 아기는 내가 앉아서 아기를 자 희원이는 가슴에 얼굴을 박고 젖을 찾아서 힘차게 빨기 시작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젖을 빠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픈 것도 잊을 만큼 너무 행복했다.

지금도 그날의 행복감과 감동은 내가 사는 동안 기억하는  가장 행복한 기억 중 하나이다.       


관사에서의 생활은 고달팠지만, 그래도 좋은 점도 있었다. 아침이면 물안개 가득한 맑은 공기와 새소리에 깰 수 있었고, 개구리 소리를 하루 종일 듣고, 경춘선 기차 소리를 들으며 자장가로 ‘기찻길 옆 아기아기 잘도 잔다~’ 나는 노래를 부르며 희원이를 재우면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키우는 방울토마토와 옆집의 깻잎, 뒷집의 고추 등을 서로 나눠먹을 수 있었다. 당시 군의관의 월급은 80만 원 정도여서 기본적인 것들과 보일러 유값 등을 제하고 나면 식비는 20만 이내로 써야 해서 식비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 자급자족하게 되었다. 가을이면 익은 호박을 동네 할머니들이 길에 내놓으셨고 그걸 주워와서 호박죽을 끊여 먹었던 소박하고 행복한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목욕비가 꼭 필요했다. 특히 겨울에는 어린 아기와 난방이 안 되는 화장실에서 목욕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읍내 목욕탕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가야 했다.


그러고 나면 아기의 분유와 기저귀값이 빠듯했다. 그걸 알기나 하시는 듯이 아기 낳고 관사로 돌아온 후 매달 한 번씩, 분유와 기저귀 한 박스가 배달되어 왔다. 엄마였다.


그와 정반대로 출산으로 몸을 풀기도 전에 시어머니의 언어적 폭력과 인격 말살은 다시 시작되었다.


“야~이 개씨부랄년아! 니 땜에 내 인생이 다 망가짓데이. 사랑이 그 깟게 뭐라꼬...그 까짓거 땜에 남의 인생을 이렇게 망치놓나? 니가 아들 낳았다고 다 끝났다고 생각말레이! 내가 니들 꼭 이혼 시킬끼다. 우리 아들 이제 다시 갤혼해도 좋은 색시감들이 **역까지 줄을 설끼다..!”


시어머니는 허구한 날 술에 취해서 X가 출근한 후에 전화를 해왔고, 뒤에서는 말리는 시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됐다. 오닐은 고마하레이~’     


이뿐이 아니었다. 시어머니의 엄마 즉, 시외할머니가 어느 날 전화해서


“니 그 시애미가 한테 500만원을 빌려갔데이, 니가 좀 갚아주면 안되겠나? 친정에 부탁해가 좀 갚아주면 좋겠데이.”     


한도 끝도 없는 빚더미들이 결혼 후 쏟아져 나왔다,

결혼 전 부모님은 자상하고 평범한 분들이시고, 자신은 유명 명문가의 자손임을 강조했던 X의 모든 것은 거짓말들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X만을 그 자체로  사랑했기에 한 번도 투정하지 않았고, X에게 일일이 다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X에게 그런 부모는 가슴 아픈 치부일 것이 분명하고, 이제와 잔소리를 한다는 건 자존감에 상처를 주는 일이라 생각해서 내가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뎌 보려 했다.

왜냐하면 난 X를 사랑했고, 믿었고, 나의 아픔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참아나가면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해결되고 행복한 날 들이 올 줄 알았다. 그때까진.     


주말에 친정 부모님이 강원도 관사에 오셨는데, 들어오시면서 엄마는 청소를 시작하셨고 아버지는 집 주변을 살피면서 뱀이나 곤충들이 있을 수 있다시며 명반을 주변으로 뿌려주셨다. 참 내밀기 어려운 도시락 반찬처럼 아무 말도 하기 어려웠다.


 점심을 드시고 이러저러한 이야기-내의 미화된 시골살이-를 듣고 가려고 일어나시면서 아버지가 차키를 X에게 넘겨주시면서

“이런 오지에 살려면 차가 꼭 필요할 것 같으니 내 차를 줄 테니 쓰게. 약수터 갈 때도 그렇고 희원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차가 있어야지!”


그렇게 두 분은 차를 우리에게 주시고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셨다.      


두 분이 돌아가신 후 나는 엉엉 울었다.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X도 두 분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사실 X에겐 결혼 전 오래된 프라이드가 있었다. 그런데 군 생활을 시작하면서 시아버지가 차를 여동생에게 주라고 불호령을 내려서 시누이에게 주려고 시댁에 갔다. 그때 시누이의 화장대에 놓인 값비싼 외제 화장품 세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걸 의식했는지 시누이는 ‘가 피부가 예민해서 이거 아님 알레르기가 생겨요. 언니도 한 번 써봐요. 좋아요.’


피부가 예민하고 중요하지 않은 여자가 누가 있을까? 내가 그런 걸 살 돈이 있으면 은행이자 내고 시어머니의 빚을 갚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차를 넘겨주고 오니 시골 오지에 사는 우리에겐 차가 없었다. 이를 눈치채고 키를 넘겨주시고 기차를 타고 가시는 두 분에게 나는 너무 죄송스러웠다.


그렇게 사는 꼴과 시부모의 학대를 버티며 사는 자식을 보는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난 참 바보같은 선택을 한 못난 불효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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