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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사 Jan 29. 2024

원하지 않는 것을 안 할 권리

변호사로부터 소장 최종 수정본 메일이 왔다.


2011년 추석 연휴에 내가 산부인과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보호자로서 의무를 소홀히 하고 대신 연휴기간에 상간녀와 캄보디아로 여행을 갔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사실 남편은 내가 수술을 할 때마다 보호자 역할을 하지 않았다. 친정아버지나 큰 아들에게 보호자 역할을 맡기고 자신은 출근해 버렸다. 소장이라는 게 법률용어가 엄청 있는 어려운 건 줄 알았더니, 그냥 에세이를 요약해서 객관적이고 간략하게 쓰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개인적인 억울함이나 괴로움은 포함되지 않고 사실만이 나열되어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고들의 부정행위와 피고 이상훈의 혼인 파탄에 대한 책임, 피고 김경아의 공동 불법행위 책임으로 이혼한다. 그러니 재산을 분할해서 서로 헤어지자 뭐 이런 거다.


어린 시절에 소꿉놀이 하다가 삐져서

 ‘나 집에 갈래.. 내가 가져온 소꿉놀이랑 벽돌가루는 내가 가져갈 거야..’

뭐 그런 거 같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안에 나의 고통과 분노를 다 담기엔 정말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변호사에게 이제 접수하겠다는 메일이 왔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 냉장고에 사둔 소주를 꺼냈다. 술도 제대로 못 마셔서 소주는 대학 때 이후 먹지 않았는데, 이번 일로 두 번째로 사게 되는구나. 빈 커피잔에 소주를 1/4쯤 따라서 마셔보니 그리 쓰지 않았다.


“ 먹어보니 뭐 내 인생보다 쓰지도 않네...ㅎㅎ”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반 병을 마셨다. 졸음이 와서 침대에 누우면서 오늘 한 끼도 안 먹었다는 생각에 배달의 민족을 처음으로 신청해 보기로 했다. 아무거나 피자를 주문하고 잠이 들었다. 초인종 소리에 놀라 일어난다는 것이 옆에 놓인 잔과 소주를 엎으면서 작은 탁자 위로 쓰러졌다. 공동현관을 열어 주고 현관앞에 뻗어 버렸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이러고 있는 내가 너무 한심해서 웃음이 나왔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 현관벨이 울렸다. 아마 피자 배달이 온 모양이다. 술에 취해 나가려는데, 자꾸 머리가 무거워져서 바닥으로 쓰러지며 네 발로 기어나가서 피자를 가져다가 바닥에 두고 한쪽을 먹었다. 맛있었다. 두쪽, 세 쪽 마구 먹었다. 평소에는 두쪽 이상 먹지도 않던 피자가 마구 먹혔다. 이건 무슨 일이지? 살아야겠다는 속내가 이렇게 나타나는 건가?


다음 날 내 얼굴과 몸은 온통 멍으로 가득했다. 술에 취해 기어가면서 머리가 무겁다고 느낀 것이 머리를 바닥에 박았던 모양이다. 거울을 통해 본 내 얼굴은 붓고, 얼룩떨룩 하게 다양한 색으로 변해있어서 웃어버렸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내 얼굴과 몸은 내 마음처럼 여기저기 멍이 든 모습이었다. 


어젯밤 나는 현관 앞에 아무렇게나 누워서 피자를 마구 먹다가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이제 눈치 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올바르게 살려던 내가 바보다. 애들이나 나와 상관없이 지 맘대로 사는 전남편을 두고 난 늘 눈치를 보며 살았다. 술도 안 마시고, 학교와 집 이외에는 별달리 약속을 잡지도 않았다. 피자를 먹어도 작은 접시에 예쁘게 담아서 잘 정리된 식탁 위에서 포크와 나이프로 먹었다. 그렇게 잘 정리되고 룰에 맞추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런 내가 피자를 게걸스럽게 손으로 마구 먹던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 맘대로 하련다. 아무렇게나 어지르고 안 씻고, 안 닦고, 아무도 안 돌보고 안 할 거야. 이제부턴!

나도 안 하고 싶은 건 안 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할  권리가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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