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르기가 있는 희원이와 민우가 환절기라서 목이 아파서 이비인후과를 다녀왔다는 문자를 받고 민우에게 전화를 했지만 민우는 받질 않았다.
전화를 받은 희원이는 걱정할 정도 아니고 자기가 데리고 병원 다녀왔다고 엄마를 안심시켜 주었다.
민우는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가서 일방적으로 일상적인 문자만 보내는 엄마에게 화가 난 것이 분명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20년 넘게 키운 엄마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수능을 앞두고 민우에게 이 모든 사실은 너무 큰 충격이기 때문에 숨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를 너무 좋아하고 존경하는 민우가 전남편의 오랜 불륜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소장과 일부의 증거를 보여준다 해도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지난 한 달 동안 겪은 트라우마와 충격처럼 그 아이에겐 자신의 삶 전체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아픔일 것이다. 그래도 알려주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두 아들에게 모든 진실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으니까.
천천히 걸었지만 1시간 정도 걷고 나면 땀이 나고 그래도 운동을 했다는 뿌듯함으로 집으로 와서 샤워와 청소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그랬는데도 아직 9시가 안 되는 시간이다. 시간이 너무 길고 천천히 간다.
카톡으로 지영과 한참 수다를 떨었지만, 지영이는 나에게 이제 좀 쉬라고 하는데 난 그게 익숙하지 않은가 보다. 초조하니 이완이 되지 않고 돌볼 사람이 없으니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게 자유인가? 그럼 이제부터 난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회전의자를 돌려 창밖을 보며 햇살과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문뜩 본 내 허벅지가 너무도 가늘고 야위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한 달 동안 10킬로 이상 살이 빠지면서 온몸의 근육이 사라졌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러지 않으려 해도 지난 몇 년간 삶에 대해 오만했던 나 자신을 탓하게 된다.
집으로 돌아와 소장을 다시 한번 보면서 몇 가지 수정사항을 발견하고, 변호사에게 메일을 보냈다. 소장과 함께 첨부되었던 분할대상재산 명세표에 적혀있는 요구사항에 시세를 알아보기 위해 여기저기 부동산에 전화를 돌려서 조사한 후 내용을 첨부해서 보내면서 일정에 대해 다시 한번 문의하는 내용을 추가하였다. 내가 너무 재촉하는 게 부담스러울까 망설였지만, 조급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고, 게다가 내가 수임료를 줬는데 뭐... 내가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에 용기를 내봤다.
어제 법원에서 온 서류를 받으러 새벽부터 우체국으로 향했다. 전철에서 내려보니 이혼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변호사 광고가 기둥마다 있는 것을 보았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텐데, 하나하나 읽으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혼을 하고자 하는구나를 느끼게 된다. 우체국에 온 법원등기는 며칠 전 해결한 관리비 연체에 대한 독촉장 강제집행에 대한 취하서였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랜다고 이런 서류가 지속적을 날아오는 것에 난 너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너무 온실에서 자랐나 보다는 생각을 하며 상담예약이 잡힌 병원으로 향했다.
라테를 한잔 사서 대기실에서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약에 대해 물었고, 지난주 내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꿈을 꾸며 한밤 중에 놀래서 깨고 다시 잠들기 쉽지 않음을 이야기해서 약을 바꿔야겠다고 하셨다.
몸무게가 3주 만에 10kg가 빠진 상태라서 몸이 힘들다는 이야기에 약과는 상관없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살이 빠지면 잠도 잘 들기 쉽지 않다고 하셨다. 왜 그렇게 못 자게 되는지 묻는 말에, 원래 일정보다 많이 뒤처지는 데에 초조함이 더해진다는 이야기를 했다. 9월 초에 소 제기를 하기로 했는데 아직 소장 초안을 한번 보고 난 상태라서 추석 전에 소송 제기를 하고 송달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내 마음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니 초조하고 불안함이 커진다고 했다.
게다가 둘째 아들이 한 달 넘게 안 들어오는 엄마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이 겹쳐서 카톡에 답을 안 하니 마음이 너무 아프고, 큰 아들과 몰래 만나는 것도 너무 억울하고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왜 이래야 하는지 속상함에 아들에게도 너무 미안한 마음만 커진다고 했다.
“선생님~ 제가 잘하고 있는 건가요?”
“현명하게 잘 처신하시고 준비하고 계시면서 왜 그렇게 불안하세요?”
“솔직히 도망가고 싶어요.”
“다 피하고 싶고 이게 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한 번씩 이게 현실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돼요.”
“아이들을 지키고 나의 미래를 위해 버티고 견뎌야 하는데 나쁜 짓 한 년놈들은 당당한데, 난 이렇게 짧은 시간에 헐레벌떡 준비해서 대충 떨어져 나가게 된다고 생각하니 억울해요. 전남편 그 인간에 대한 미련은 1도 없어요. 생각할수록 끔찍하고 다시 마주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럴수록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픕니다.”
눈가에 열감이 느껴지고 무언가 쏟아 오르는 것 같았다. 겨우 참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위자료 1억으로 제가 위로가 될까요? 그들은 그것도 많다고 깎겠지만, 그 돈이 화대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럽게 느껴져요. 물론 지금 돈이 제게 필요하지만 그 년놈들에겐 그 무엇도 받기 싫어요.”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내 이승철의 ‘아마추어’를 들었다.
‘난 정말 아는 게 없다...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기에 모두가 처음 서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모두 다 같은 아마추어야. ’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다 잡고 그래도 나의 아이와 나의 미래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소장에 대한 답변이 왔다.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수정해야 할 부분에 표시를 하고 나의 의견을 몇 가지 추가했다.
몇 번 읽고 나니 내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 논문이 사례연구를 쓰는 것처럼 객관화가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