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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지 Oct 24. 2021

글로 의미 찾는 새벽

람보 탄생 D+180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인싸는 아니었지만 자신만의 작은 그룹 속에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걸 좋아했고 모임이 유지되는데 비교적 열심이었다. 사람을 좋아했고 여행을 좋아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무작정 밖으로 나가 걷거나 사람을 만나 맛있는 걸 먹고 수다를 떨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밤이면 이를 갈고 체기가 잦았다. 치과와 한의원에 가면 자꾸만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을 찾으란다. 


부모님과의 원만한 관계, 시기적절한 취업과 결혼. 겉으론 우울할 일 전혀 없어 보이는 그녀였지만 그건 약간의 껍데기 같은 것이었다. 겉으론 하하 하고 웃었지만 사실 꽤나 욕심이 많았다. 공부도 잘하고 싶었고, 일도 잘하고 싶었다. 예쁜 사람이고 싶었고, 친구도 많았음 했는데 자신감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도 몰랐다. 게으른 자신을 자책하는 건 일상이었고, 말 못 할 엄마와의 사정이 있었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빛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속상해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찌질이 궁상이었다. 그 찌질이 궁상인 그녀는 내게 너무나도 의미 있는 사람이다.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두 문단으로 적어낸 그녀의 모습을 나는 지난 1년 간 글을 쓰면서 무수히도 토해냈다. 인정하기 싫었던 내면의 모습을 글 속에 담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은 아니었는데 글을 쓰려니 나를 꺼내지 않으면 써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글을 썼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라는 심정으로.


참 아이러니하게도 누가 보는 게 아니라는 생각 때문인지 글을 쓰다 막히면 그냥 말았다. 누가 보지 않아서 썼는데 아무도 보지 않으니 쓰기가 싫어졌다. 그래서 글쓰기 모임에 문을 두들겼다. 제발 나랑 같이 좀 쓰자고~ 내 찌질한 얘기 좀 들어달라고~~


'글쓰새' 글쓰기로 여는 새벽을 뜻하는 글쓰기 모임을 만났다. 황홀한 글 감옥의 문지기이자 혹독한 교도관 스텔라는 나에게 처음 글쓰기를 제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분의 글쓰기 모임에 발 한번 담갔다가 1년을 빠져나오질 못했다. 그 속에서 나는 둘째를 배 속에 품은 채 글벗들과 새벽 글쓰기를 했다. 이른바 '태교 글쓰기'라 명명하고 말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셀프로 100일간의 1일 1 태교 글쓰기도 하고, 둘째가 태어난 지 80일째 글벗들과 함께 100일 동안 글을 쓰는 '글의새' (글로 의미 찾는 새벽)도 했다.




100일간의 글쓰기 해보니까 어떠냐고?

누구나 할 수 있어 보이지만 아무나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라톤과 비슷한데 (한 번도 뛰어보진 않았지만) 의지는 개나 줘 버려야 한다. 그냥 몸과 정신과 영혼을 글쓰기에 맡겨야 한다. 그리고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 나에겐 글벗들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글을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의무적으로 코멘트도 짧든 길든 남겨줬는데 그 덕분에 내 글의 독자가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는 부담보단 엄청난 힘과 에너지가 되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글벗들 얘기를 조금 풀어보자면 어떨 땐 너무 멋져 보였고, 어떨 땐 나와 같은 지지리 궁상인 면도 볼 수 있었다. 멋진 소명의식과 꿈이 있고 내가 부러워하는 자신감도 뿜뿜 내장되어 있는 글벗이 하루는 나 왜 이러냐며, 아이들에게 화를 낸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뭔지 다시 한번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당연한 듯 보이는 명제를 글 속에서 겨우 찾기도 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에겐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글벗들은 나의 괜찮은 면모를 손수 찾아주었고, 내가 찌질해도 괜찮다는 안전망을 펼쳐주었다. 어디로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견고한 안전망이었다. 나는 점점 내가 괜찮아지고 있고 좋을 때도 생겼다. 어제보다 내일 더 스스로가 좋아지길 갈망하며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글벗들의 코멘트를 기다린다. '나 어때요~? 잘하고 있죠?^^'


100이란 숫자는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글을 쓰는데 원동력이 되었고 양념처럼 재미를 가하기도 했지만 결국 난 그냥 글을 쓴 것이었다. 100일 동안 글을 썼다고 해서 엄청나게 필력이 늘은 것도 아니고 100일이 지났다고 해서 끝도 아니다. 나는 그저 어제도 글을 썼고 오늘도 글을 쓰고 있다. 아, 그냥은 아니구나. 아주 감사하게도 말이다. 감사한 마음이 가득 생겼다.




육아가 힘든 줄 알았는데 나를 괴롭히는 건 나 자신이었다.

육아가 힘들어서, 아이를 낳은 후의 삶이 너무나도 퍽퍽해져서 정처 없이 글을 썼다. 쓰다 보니 나를 괴롭히는 건 육아가 아니라 나 자신임을 깨달았다. 살림과 육아를 척척 해내지 못하는 내가 못나보였고, 일터로 돌아가려니 자신 없어하던 내가 싫었고, 사람과 여행은 좋아하면서 정작 나 자신을 좋아하지 못하는 내가 보였다. 


출산을 하고 2인분의 삶이 되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1인분의 삶"(아빠의 아빠가 됐다, 조귀현). 스스로 삶을 소중히 여기고 정성 들여 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글도 쓰고, 육아에 대한 생각도 써보고, 엄마와의 갈등도 썼다.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을까 싶어 내면으로 파고들어 가 보니 모두가 떠난 고3 수험생 교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18살의 나도 볼 수 있었다. 다 토해내고 나니 이제는 잘 쓰고 싶기까지 하다. 아직 토해낼 게 더 많긴 하지만.


글을 쓰다 보니 첫째 육아할 때와는 달리 둘째는 딱히 우울증 올 일이 없었다. 빨래를 개는 대신 글을 쓰는 걸 선택했고, 요리 하나를 완성하는 대신 글을 발행하고 글벗들의 글을 살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괴롭힘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작아졌고, 글감이 필요하여 내 삶을 조금은 한 발짝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한참 떼쟁이 33개월 첫째와 잠투정 심해진 5개월 둘째 때문에 '지겨워, 힘들어 죽겠어'를 외치는 요즘이다. 며칠 전 새벽, 잠투정하는 둘째를 안아 올려 어화둥둥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너무 고귀해 보이는 게 아닌가? 아.. 드디어 미친 건가? 싶었는데 마치 먼 미래에 있는 내가 텔레파시를 보내오는 것처럼 내가 지금 이 상황의 주인공인 것만 같고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의 나를 미화하는 미래의 내가 보이는 듯했다. 

그리곤 속으로 외쳤다. 다음 글감은 이거다.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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