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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짠 Jul 26. 2022

기억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추억 vs 상처 = 음성 vs 양성?

‘양성종양입니다’하는 소리를 들으면 천둥이 머리 위로 내리 꽂히는 심정이 다. 양성이란 ‘암이 될 수 있는 녀석입니다.’라고 실체를 밝히는 것 같아서다. 마치 고통스러워하다가 죽게 된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다행히 그런 일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서 불안한 인생이란 어드벤처를 감당할 수 있. 대단한 행운을 기대하지도 대단한 불행이 닥칠까 봐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시소 타기를 적당히 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술도 마시고 사랑도 하고 잠도 잘 수 있나 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종양 이야길 꺼냈을까?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다가 '좋은 기억이 더 많을까? 나쁜 기억이 더 많을까?' 나의 기억의 실체가 궁금해져서 떠오른 질문이다.

나란 사람을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면 뭐가 떨어질까? 세탁하기 전 옷을 털거나 주머니를 뒤지면 먼지 영수증 또는 어쩌다 동전이 떨어지듯 내 안에서는 무엇이 튀어나올까?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라 답도 두리뭉실하게 튀어나온다. ‘좋은 추억이 더 많아서 내가 잘 웃는 편이겠지?’라고.     


좋은 기억은 '추억'이라 하고 나쁜 기억은 무엇이라고 할까? '트라우마' '아킬레스건‘ 이런 자극적인 표현이 나쁜 기억의 대명사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나쁜 기억은 다양하겠지만, 한 단어로 정리하면 '상처'이다. 추억은 음성 종양, 상처는 악성 종양이라고 별칭 아닌 별칭을 붙일 수 있다. 자. 이제 처음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추억이 더 많을까? 상처가 더 많을까?'


인생의 반을 나쁜 기억에 시달리며 현재를 누리지 못했었다. '엄마의 죽음', '아빠의 투병, ' '암' 이런 새빨간 피 빗 단어들이 나를 사로잡아서 내가 보는 미래 속 나는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죽을 운명'의 여주인공 같았다. 그것은 마치 '양성종양입니다. 언젠가 당신은 암에 걸릴지도 모릅니다.'와 닮아있었다. 불행이 닥칠까 봐 두려운 심정으로 살았으니까.


상처에 붙들린 채 이십여 년을 살았으면 충분히 시간의 가를 치다. 시간의 대가를 치야 했던 이유는 아직 모르지만, 이젠 좋은 기억의 명사형 '추억'에 이십 년을 투자하고 싶다. 양성종양이 아닌 '음성이라서 걱정 안 해도 됩니다.'라는 기억을 소환하며 사는 태도 말이다. 기분 좋아지는 '추억의 명화 다시 보기'하듯이. 그래서 나에게 추억이란 다시 보기 기능과 닮은꼴이다.  


'나쁜 기억 다시 보기'로 양성종양을 보듯 인생을 봤지만, 이젠 '좋은 기억 다시 보기'로 음성 종양이라 안심하며 인생을 볼 자신이 있다. 상처 대신 추억을 보고 싶다. 추억 속에 미소짓다 보면 추억을 만들 일도 많이 생길 것다. 너무 극에서 극으로 바뀐 것 아니냐고? 맞다 양성과 음성이 극단적이듯, 나의 인생 태도도 극단적으로 바뀌었다. 물론, 교집합처럼 중간을 왔다 갔다 하지만, 아무튼 나는 태도가 바뀌었다.    

 

그걸 가능하게 해 준 신의 한 수가 바로 글쓰기이다. 아침 글쓰기를 꾸준히  천일 동안, 나는 작가가 됐고 인생을 안심 줄 알 게 됐고 무엇보다 무지개 너머를 기대하기까지 하니, 정말 위대한 글쓰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글쓰기가 아니다. 글쓰기가 가능하게 한 '태도'이다. '상처에서 추억'으로, '탓하기에서 덕분'으로 바뀐 태도 말이다. 이제 기분 좋은 다시 보기로 기분 좋은 예고편을 만들며 다.     

당신이 의사라면 당신 인생 속 기억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 주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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