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맑음의 바다 Feb 02. 2024

우리 여기 지금

멀리 보기는 잠시 멈춥니다



파란 하늘 새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아침. 무주리조트 곤돌라 매표소 앞 작은 스크린에는 흐린 구름 속 덕유산 향적봉의 모습이 실시간 상영되고 있었다.


오래전 제주도 한라산을 갔을 때 구름에 잔뜩 가려져있던 백록담을 본 적이 있다. 힘들게 정상에 올라왔는데 백록담을 못 보다니. 모두가 실망하던 순간 구름이 쫘악 걷히며 그 모습을 드러냈었다. 다시 구름이 덮은 건 순식간이었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찰나에 일어났다. 그래서 그날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여행은 그런 것이다.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그날만이 가질 수 있는
기묘한 매력이 있다.



매리골드 안녕? _ 무주리조트 곤돌라 타는 곳



노랑과 주황 동글동글 매리골드 꽃의 강렬한 환영인사를 받고 곤돌라 타는 곳으로 갔다. 곤돌라 안에서 보는 덕유산 능선이 포근하고 아름다웠다. 푸른 나무들이 몽글몽글 산을 가득 메우고 저마다 다른 초록색이나 하나인 듯 어우러져있었다.


매표소도 이미 해발고도가 높았었는데 곤돌라를 타고도 한참을 올라갔다.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곤돌라는 처음이었다. 우리 가족은 풍경을 보다가 서로 이야기하며 장난도 치다가 사진도 찍다가 더 이상 할 게 없을 만큼 심심해질 때쯤 설천봉에 도착했다.



눈부신 하늘과 싱그러운 덕유산 자락 _ 곤돌라 안에서



뜨거운 해가 작렬했다. 곤돌라 내리면 기온이 확 떨어진다고 해서 바람막이 점퍼도 준비했는데 그저 후덥지근 덥기만 했다. 온도계는 21도라고 알려주는데 체감은 31도 같았다. 이때부터 나는 우리 가족에게 닥칠 위기를 감지한 것 같다.


왕복 30분이면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높은 1,614미터 향적봉을 정복할 수 있다며 슬리퍼 가능, 등린이 가능 코스라고 등산 블로거들이 극찬한 그곳에 우리는 와있었다. 심장제세동기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판에 의문을 품으며 나무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껏 등산길에 심장제세동기를 본 적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등산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니 별 도움 안 되는 통계이긴 하다.)


중간중간 쉬어가라는 간판과 심장제세동기 위치를 알려주는 간판을 셀 수 없이 지나치면서 깨달음이 왔다. 곤돌라로 쉬엄쉬엄 왔고 왕복 30분 600미터만 가면 된다고 해서 내가 우스웠니? 향적봉이 코웃음 치는 듯했다. 같이 올라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알 것 같았다. 편한 신발에 가벼운 차림새였지만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워 보였다.


우리는 신속하게 말을 잃어갔고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다. 햇살은 뜨거웠고 비 온 뒤 습기로 눅눅했다. 심장이 터질 듯 숨이 가빠왔다. 나의 딸이 힘들다며 끊임없이 멈춰 섰기에 쉬어가라는 푯말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무조건 쉬었다.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내가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했다. 웃자고 농담도 하고 재미로 내기도 걸면서. 나의 딸과 남편은 꿋.꿋.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의 페이스메이킹에 전혀 휘말리지 않았다. 불타오르는 허벅지를 애써 부여잡고 앞서 뛰어올랐던 나의 노력이 무색하게. (우리 셋 중에 제일 저질체력은 ‘나’라는 걸 잊지 말자.)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온몸으로 느끼며 무거워진 다리를 끌며 근근이 올라가니 왕복이 아닌 편도로 30분이 걸려 도착했다. 진정 3시간 같은 30분이었다.






뜨거운 해가 없다. 파란 하늘이 없다. 끈적한 공기도 사라졌다. 정상에 오르니 순간이동을 한 듯 멍해졌다. 그저 하얀 구름만 넓게 퍼져 향적봉 정상을 감싸고 있었다. 맑은 날이면 가야산, 지리산, 무등산 등 파노라마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오늘은 구름에 다 가려져 있었다.


구름 베일에 싸인 향적봉 _ 줄을 서서 찍은 정상석



오늘은 멀리 보려고 하지 말고 지금 현재 이곳을 보라고 부드러운 구름이 커튼을 친 것 같았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하루하루 재미있게 보내는 것에 진심인 적이 있었다. 그다음 날은 나의 세상에 없었기에. 오직 오늘 놀아야 했고 지금 즐겨야 했다. 언제부터 오늘은 없고 과거를 후회하며 내일만 바라보게 됐을까. 언제부터 지금을 보지 못하고 멀리 보려고만 애쓴 것일까.


내일의 즐거움을 위해
오늘을 포기했지만
내일은 또 다른 ‘포기하는 오늘’이었다.

멀리 보면 볼수록
‘지루한 오늘’만 쌓여갔다.
‘재밌는 내일’은 신기루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구름 속 향적봉에서 나의 딸과 남편과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오롯이 집중해 본다. 더워서 땀을 흘리고 얼굴을 붉히고 숨이 차 심장을 쿵쾅거리는 고마운 내 몸이 여기 있고. 정상에 올라와 평화로운 표정으로 서로 기대어 쉬고 있는 사랑스러운 나의 가족이 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오늘 우리가 덕유산 향적봉에 올라와 숨을 헐떡이며 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더위를 끔찍이도 못 견뎌하는 남편과, 노는 게 제일 중요한 9살 인생 나의 딸과 함께 후덥지근한 이 여름, 여기에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금을 들여다보니

그 설득과 협상의 시간을 거쳐
편안함을 깨고 나와

더 단단히 빛나고 있는
우리가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친구들 또는 가족과 함께 향적봉에 올라 각자의 방식으로 정상도달을 즐기는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가 환하고 밝은 얼굴이다. 힘들게 올라왔기에 그 미소가 더욱 값진 것이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지 모를 크고 작은 바위들도 많이 보였다. 그 바위 사이로 비집고 자라난 풀들, 풀꽃들을 놓치지 않고 알아보았다. 눈에 다 안 보이는 작은 곤충들, 사람이 없는 동안에 다녀갈 동물들도 그려보았다. 구름 속 동그라미 안에 우리 모두가 함께 머물고 있었다.


봉우리 위에서 이렇게 가까이 보는 파노라마도 생기 넘치고 멋있었다. 오늘 내가 마주한 모든 고귀한 존재들이 고마웠다. 그 자리에 있어줘서. 각자의 위치에서 오늘을 환하게 빛내줘서.


구름아 고마워.

우리가 여기 지금에
머물게 해 주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