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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의 바다 Feb 09. 2024

내가 만들어 가는 길

흐름이 되다



날씨가 참 좋았다. 일상에서 벗어나기 딱 좋은 날이었다. 하늘에 뭉게구름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나보고 쉬어가라고 하는 듯이. 그래 오늘은 나도 너처럼 마냥 둥실 거리고 싶어. 지금은 대부분의 직장인이 가만히 있어도 제일 행복한 시간, 금요일 오후니까. 하루의 일상을 반나절 미리 탈출하여 월악산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우리나라 3대 악산이라는데 그 ‘악’ 자가 무슨 한자인지 월악산에 들어간 ‘악’ 자와 같은지 이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한자는 물론 언어를 불문하고 모든 문자에 전혀 관심 없는 남편에게 또 문자에 집착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사실 나의 언어적 호기심을 어이없어하는 남편의 반응이 재밌어서 늘 질문하게 된다. 남편의 집요한 지리적 기억력을 내가 황당해하는 것과 결이 같다고나 할까.


3대 악산의 타이틀이 무색하게 산이 주는 첫 느낌은 엄마의 따스한 품 속 같은 푸근함이었다. 멀리서 보는 능선이 부드럽고 둥글했다. (물론 악산의 명성을 견고히 할 만큼 등산이 힘든 산이라는 걸 사진으로 많이 봤다. 그래서 우리는 월악산 등반을 언제 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닷돈재 야영장 하우스에 짐을 내리고 바로 앞에 보이는 송계계곡으로 달려갔다. 금요일 오후 계곡은 한산했다. 물 흘러가는 소리가 주변 소음을 부드럽게 덮어주었다. 널따랗고 반듯한 바위를 하나 골라 우리 셋이 나란히 앉았다.


맑은 계곡 물속에 작은 물고기들이 무리 지어 헤엄치는 게 보였다. 해는 어느 정도 넘어가서 그늘이 적당했다. 발을 담그고 앉아있으니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온몸이 시원해져서 지금이 가을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남편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신이 난 나의 딸은 물속을 첨벙거렸다. 손으로 물방울을 튕겨보기도 하고 다리로 물줄기를 만들어보기도 하면서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물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여 바람에 흩날려갔다. 순간이 고요해지면서 마음이 너무나 편안해졌다. 찰나가 영원할 것 같은 순간. 자연은 언제나 이렇게 나를 따스히 감싸 안아준다.



계속 보고 있으면 나도 투명해질까



가만히 있기 심심해진 딸과 뭔가를 해야만 했기에 자리를 이동하기로 했다. 가만히 있기 제발 원하는 남편을 크고 넓은 그 바위 위에 남겨두는 걸 잊지 않았다.


우리 가족끼리 멍 때리기 대회를 개최한다면 3등은 나의 남편일 것이다. 하루종일 손에서 폰이 없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궁금할 때도 있었다. 그런 남편이기에 폰 속의 온라인 세상에서 벗어나 잠깐이라도 현재 몸이 머문 곳에 마음도 같이 머물기를 바랐다. 가만히 있는 몸과 같이 마음도 그곳에 가만히 지금을 바라보기를 바랐다.


나는 딸과 함께 계곡 상류로 탐험을 나섰다. 미국 자이언 국립공원에서 협곡 사이 버진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와 같은 비장한 각오는 필요 없었다. 등산스틱도 튼튼한 아쿠아슈즈도 비상식량도. 많은 관광객들의 부산함도 없이 우린 한가로웠고 느긋했다. 언제든지 원한다면, 남편이 우릴 기다리고 있는 네모 단정한 바위로 돌아가면 되니까.



걷다보니 힘들어서 놀라고, 풍경에 더 놀랐던 _ 자이언 국립공원



무작정 물속을 걸어가기 시작했는데 꽤나 집중이 필요했다. 물이 깊었다가 얕았다 하며 깊이가 수시로 바뀌었다. 큰 바위가 줄지어 있다가 작은 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기도 했다. 어느 돌을 밟을지 어느 방향으로 갈지 매 발걸음마다 주변을 보고 판단해야 했다.


물속에 가득한 돌의 색깔과 모양, 표면이 제각각 얼마나 다른지 비슷한지 보았다. 맑은 계곡물이 얼마나 내 발을 투명하게 비쳐주는지 보았다. 나의 발걸음이 물을 가르며 첨벙거리는 소리, 돌과 돌이 부딪히며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물이 내려오는 길을 우리는 그렇게 거슬러 거슬러 올라갔다. 그냥 계곡을 걷는 것인데도 신선했고 새로웠고 심장이 뛰었다. 시원한 물속에서 내 몸과 마음도 서서히 상쾌해지는 걸 느꼈다.


아주 커다랗고 비범하게 솟은 바위가 눈에 띄었다. 우리는 그곳을 전환점으로 정했다. 그 바위 위에 앉아서 내려다보니 우리는 생각보다 꽤 멀리 와있었다.


바위 위가 평평해서 우리 둘은 나란히 팔베개를 하고 누워보았다. 하늘은 눈부시게 넓었다. 햇빛에 데워진 바위는 시원해진 우리 몸에 적당히 따스했다. 딸과 나는 서로 마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눈을 감아 느껴지는 완벽한 자연의 냄새와 소리, 공기를 내 몸 가득 담았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물이 내려오는 길은 하나인데 우리가 올라가는 길은 수십수백 가지였다. 정해진 길이 없으니 우리가 가는 길이 곧 길이 되었다. 올라갈 때 간 길을 다시 하류로 내려올 때 똑같이 간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길을 다시 만들며 남편이 가만히 앉아있는 그 널따란 바위로 다시 돌아왔다.



자연의 빛깔은 조화롭다 _ 다음날 아침






물은 흘러가며 그렇게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었다. 가는 도중에 이런저런 돌에 부딪히며 방향을 틀기도 하고. 부딪힌 돌을 깎으며 그대로 나아가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멈춤 없이 그렇게 길을 만들며 계속 흘러갈 것이다.


나의 인생도 흘러가는 하나의 물줄기 같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매 순간 어느 방향으로 갈지 고민과 선택의 연속이다. 계속 부딪혀서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때로는 주변 돌에 맞춰 흘러가야 한다. 옆에 돌을 깎아내면서 밀고 나아가야 할 때도 있다.


먼 훗날 돌아본다면 이런 각자의 흐름이 모여 아름다운 폭포가 만들어져 있지 않을까.


월악산 송계계곡은
쉴 새 없이 흘러갈 것이고

오늘 나의 인생도
길을 찾아 흘러가고 있다.



저 별들도 길을 찾아 갔을거야 _ 깊은 밤 야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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