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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의 바다 Feb 16. 2024

순간을 박제하는 마법

또 다른 한 겹의 추억



태양은 뜨거운 열기를 있는 힘껏 내뱉고 있었다. 우리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그 열기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물이 제법 빠져나간 오후 1시. 변산반도 채석강을 보려고 먼 길을 온 참이었다. 울퉁불퉁 삐죽빼죽 다양한 모양의 암석을 밟고 오르락내리락하며 걷고 또 걸었다.



너도 어디론가 바삐 가는 모양이다



저기 눈앞에 보이는데 닿을 듯 말 듯 바로 가까워지지 않았다. 버터가 데워진 프라이팬에 녹듯이 우리가 달궈진 더위에 흐물거릴 때쯤 초록머리를 풍성하게 키운 그 주름 많은 큰 암벽 채석강을 가까이 마주했다.



드디어 너로구나!



이 층암절벽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비바람과 파도에 깎이며 주변 풍경이 바뀌는 걸 보았을까.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온갖 동식물과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보며 이렇게 서있었을까. 큰 우주에 점 하나같은 인간이라는 종은 채석강 주름 하나 만들지 못하고 떠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앞으로도 계속 있어야 할 초록지구를 이렇게 뜨겁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자연이 빚은 예술작품 앞에서,
그 세월이 주는 웅장함 앞에서,
인간의 덧없는 어리석음 앞에서,
나는 압도되었고 말을 잃었다.


9월임에도 더없이 강렬히 타오르는 태양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얼굴도 태양같이 붉게 타오를 때쯤 문어같이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우리는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더위에 혼미해져서 국립공원 탐방을 여름에 시작한 게 과연 잘한 일인가 의구심이 들 뻔했다.)



하늘에 빨려들어갈 것 같은 _ 격포항



오후가 되어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격포항으로 가보았다. 거기서 채석강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고 바로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아주 좋았다. (우리 모두 오늘은 더 이상 못 걸을 것 같았다.) 물이 제법 들어온 오후 5시 30분.


물속에 계단이 잠긴 것을 보니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신들의 세계’에서 갇힌 첫 날 저녁풍경이 떠올랐다. 초록빛 맑은 물이 잔잔했고 하루종일 작렬했던 태양도 누그러졌다. 해가 넘어가고 물이 들어오고 있고 풍경이 바뀌고 있으니 무슨 새로운 일이 생길 것 같이 오묘했다.



물이 차오른 채석강, 내 마음도 충만해졌다



차곡차곡 쌓였다가, 휘몰아치듯 마블링을 만들었다가, 대각선으로 밀려 갈라졌다가, 이리저리 구멍도 내었다가, 유니콘 모양의 동굴도 만들었다가. 어느 한 곳도 같은 디자인이 없고 구석구석 특별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처럼. 자세히 볼수록 여기저기 아름다움이 피어 나왔다.



다음날 아침 물이 빠져나간 자리, 무엇이 채워졌을까



중국의 아름다운 채석강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고. 채색 채(彩), 돌 석(石)을 써서 채석강 암반이 채색된 것처럼 고운 빛깔이라 하여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는데. 나는 두 번째 설이 아기 이름 짓듯이 사랑스러워서 더 와닿았다. 우리 가족이 미국 슈피리어 호수에서 크루즈투어 하면서 보았던 픽처드 락스(Pictured Rocks)와 작명 감성이 닮아있지 않은가.



변산반도 채석강의 미국 친구 _ 픽처드 락스 국립호안






한국에서 태어나 변산반도에 오기까지 내 인생에서 수십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제야 처음 오게 된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지금보다 그 어떤 시기에 내가 더 채석강 본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을까.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어
가족과 함께 온 지금보다
그 어느 때에 내가 더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


나의 딸이 같이 걷고 둘러보고 궁금한 걸 물어보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에 같이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마다 물어보면 ‘우리가 함께 있어서 제일 좋았어’라고 대답하며 미소 짓는 딸과 같이 올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층층이 쌓인 책 같은 채석강에서 내 마음속에 추억을 한 겹 더 쌓아 올리며 우리는 숙소로 돌아갔다.



자연은 햇살처럼 닿지 않는 곳이 없다 _ 격포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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