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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의 바다 Feb 23. 2024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

둘이 아닌 하나



비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오후 2시. 이젠 제법 여름에서 멀어졌는지 가을비 느낌이 났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경쾌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에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휴일 오후의 번잡함 속에서 비를 맞으며 마음이 차분해졌다. 마치 장대비와 우산 속 나만 이 우주에 있는 것처럼.


거센 빗줄기 속
가야산 해인사로
걸어가는 길은

내 마음 깊은 곳
고요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나는 무교이지만 어릴 적부터 엄마 따라 절에 다니는 걸 좋아했다. 시끄러운 도심 속에서도 사찰 안으로 한 발짝만 들어서면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푸른 숲 속에 고즈넉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바스락거리는 나무잎사귀. 아름답게 올라간 처마 끝으로 보이는 하늘. 우아하게 울리는 풍경소리. 은은하게 퍼지는 향 냄새까지. 나는 어쩌면 어린 나이에 나도 모르게 명상이 어떤 것인지 사찰을 다니며 알게 된 것 같다. 거기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으니까. 그걸 어른이 되어서 알게 되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어려운 일을
하게 해주는 곳이 어디인지.



한 글자 한 글자 그림 같이 쓰여진 _ 긍만세이장금



‘만세를 거쳤어도 늘 지금에 머물러라’고 말하는 세로현판이 일주문에 걸려있었다. 후회의 어제와 걱정의 내일을 뒤로하고 지금에 머물기가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사실 그 ‘지금’은 조금 전의 미래였고 조금 뒤의 과거인데. 그래서 나는 과거와 미래에 뒤엉켜 지금이 없는 삶을 살아왔을까. 반대로, 미래였던 지금과 과거가 될 지금 속에서, 늘 ‘지금’에만 살 수도 있는 것인데. 해인사는 일주문에서부터 나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었다.

빗 속을 계속 걸으며 봉황문과 해탈문을 지나갔다. 넓은 마당이 나오고 해인사의 본전인 대적광전을 마주했다. 넓고 고요하고 빛나는 곳 안에 비로자나불상을 보았다. 양손을 부드럽게 마주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늘에서야 제대로 알아본 비로자나불



불이(不二).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


일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소름이 돋았다. 타임 랩스 화면 속에 나만 정지되었다.


아기가 자라면서 배우는 게 다른 것을 구별하는 것 아닌가. 엄마가 곧 나이고 온 우주인줄 알았는데. 나와 엄마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될 때 아기는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그것이 아기가 어렵게 깨우친 인생의 첫 구별인데. 우리네 삶이 고달프고 힘든 것이 그 때문일까.


어른은 아기보다 먼저 태어나서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은 먼저 익혔으나, 그게 잘 사는 법은 딱히 아니라서 숱한 우여곡절에 힘겨운 것이고. 이 세상에 처음 온 아기야말로 구별도 없고 차별도 없는 ‘불이’의 경지에 있는 게 아닐까.


아기가 태어나기 전의 세상이
해탈의 세계인가.

그것이
내가 나의 딸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있는 이유인가.


나 혼자 머릿속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내 옆에서 비로자나불상을 같이 보고 있는 나의 남편과 딸에게 미안해졌다. 당장 내 힘듦에 지쳐 너의 힘듦을 외면하진 않았을까. 너에게 주는 사랑을 다음으로 미루며 아껴 쓰진 않았을까. 내가 잘 먹는 음식은 기억했다가 다음에 꼭 다시 요리해 주는 남편을 보며, 내가 웃음을 띄우면 나에게 2배로 웃음을 전해주는 나의 딸을 보며 나는 늘 그렇게 받기만 했나 보다.


내가 받아왔던
무한한 사랑과
배려와 믿음을

이제는
너에게
아낌없이 줄 것이다.

내가 곧 너이기에.
우리는 본디 하나였기에.






비는 계속 왔다. 많이 오거나 아주 많이 오거나 그 차이였다. 신발이 진흙 범벅이 돼도 옷이 젖고 앞머리가 망가져도 기분 좋았다. 경 내에 있는 북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가야산은 물안개를 잔뜩 머금으며 훅 불어서 흩날렸다가 다시 흐읍 모으기를 반복했다. 푸른 산과 하얀 안개가 보이는 큰 창을 앞에 두고 우리 셋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한동안을 앉아있었다.



비와 안개 속에서 우리는 하나였다



+ 가야산 국립공원 탐방프로그램을 통해 해설사선생님과 20분 정도 해인사를 같이 둘러보며 많이 배웠다. (사찰에 많이 가봤어도 현판이 무슨 뜻인지, 어떤 불상인지, 손모양이 어떻게 다른지 몰랐었다.) 폭우 속에서 우리 가족만을 위해 프로그램을 운영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불이’를 몸소 실천하신 것이다.







[ 장경판전 이야기 ]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아름다웠다



대적광전 뒤편으로 고려팔만대장경판이 있는 장경판전으로 가보았다. 놀라운 건 장경각 안 바닥 재료와 창문의 크기와 방향 등 모든 게 과학적으로 설계되었다는 것. 대장경 목판이 현재까지 잘 보전되고 있는 모습이 2023년 장대비를 맞고 서 있는 지금의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여기 오기 전 우리 집은 올여름 기록적인 폭우 끝에 곰팡이 대재앙이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푹푹 찌는 더위속에서 우리는 곰팡이와의 사투를 벌였었다. 우리는 해인사에 와서 습도 관리의 놀라운 우수 사례를 우습지만 진지하게 배우고 돌아갔다.



폭우 속에서도 보송보송 신세계 _ 해인사 장경각



그 많은 날 중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에
여길 오게 된 이유들이
우리에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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