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절망과 성공 사이
바람이 차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의 남편은 반바지를 입었는데. 오늘은 가을바람이 주차장까지 마중 나와있었다. 속살을 파고드는 칼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는 혹시 몰라 준비해 온 여벌 옷을 더 겹쳐 입고 무등산 주상절리를 보러 나섰다.
장불재로 가는 입구 돌계단길을 들어섰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상쾌한 숲향기에 취해 나도 향기로워지는 착각에 들게 했다. 수많은 나무와 다양한 풀과 꽃의 살아있는 향기가 완벽하게 블렌딩 되어 자꾸만 숨을 깊이 들이마시게 되었다.
생명력 넘치는 초록이 가득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
삶에 지칠 때마다 내가 마음속으로 그리는 자연은 나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한결같이 늘 그 자리에서.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이 들어서있고, 두 사람이 나란히 서면 꽉 찰 정도로 좁은 폭의 산길이 정겨웠다. 끊임없이 위로 계속 올라가야 한다는 게 마냥 정겨울 수는 없었지만. 바닥에 놓인 돌들이 정갈했다. 크기도 비슷하고 높이도 균일했다.
나에게 너무 완벽하지 않은가. 나의 보폭에 딱 맞아떨어지는 높이여서. 너무 낮거나 너무 높으면 계속 올라가기가 힘에 부치기 마련이다. 무등산 돌계단과 궁합이 맞은 내 다리길이가 새삼 고마웠다. 오늘 나의 딸과 남편은 많이 힘들어했는데 나는 괜찮았던 이유였다.
올라가다 보니 추웠던 몸이 금세 따뜻해졌다. 다리근육이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고. 숨이 조금씩 가빠지고, 심장이 더 빨리 뛰고, 온몸에 피가 바쁘게 돌아가고. 몸은 점점 따뜻해지고, 열을 식히기 위해 땀도 좀 내고. 수분이 부족해지면 물도 마시고 싶게 만들고. 내 몸이 구석구석 열심히 일하며 살아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모두가
제자리에서
할 일을 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나는 이런 느낌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등산을 하면 할수록 좋은 걸까. 이런 내 말에 남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사실 본인도 등산이 좋아졌다는 뜻이다.)
길이 좁다 보니 셋이 나란히 갈 수가 없어서 한 줄로 올라갔다. 딸이 앞장섰다가, 남편 또는 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내려오시는 분들과 인사도 하며, 뒤에서 빨리 올라가시는 분들에게 길을 양보해 가면서.
등산객들은 연령대가 다양했는데 특히 어르신들이 나의 딸을 보시고 감탄을 연발하셨다. 대단하다. 어린애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니 놀라시면서. 애기(어른들에겐 9살도 애기다.)도 잘 올라가는데 본인은 왜 이렇게 힘들까 한탄도 하시면서. 나의 딸이 지쳐 보이면 좀 더 힘내라며 사탕이나 젤리를 아낌없이 꺼내주셨다.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 따스한 마음씀씀이에 등산하는 내내 감동의 파도가 밀려왔다.
좁은 산길을 돌계단으로 계속 올라가서 나의 딸이 많이 힘들어했었다. 그만 올라가고 내려가자고도 여러 번 말했었다. 그러다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응원을 한 몸에 받은 것이다. 처음 보는 낯선 어른들이 전해주신 따스한 친절과 미소, 위로와 응원으로 나의 딸은 젤리 같은 끈질김을 맛보았다.
결국 그녀는
끝까지 올라갈 수 있는
뜨거운 용기와
끈적한 인내심을
만들어냈다.
장불재에 가까워지자 하늘이 탁 트이면서 억새길이 나왔다. 이제야 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장불재 쉼터에 쉬고 싶었지만 꾹 참고, 바로 앞에 보이는 입석대, 서석대를 보고 와서 쉬기로 했다. 막상 올라가니 보이는 것만큼 가깝지도 않았고, 아래에서 보이지 않던 험한 길도 나왔다. 활짝 열린 하늘 아래 바람이 겨울같이 차가워서 우리는 땀 한 방울도 내질 못하고 옷깃을 더욱 여몄다.
그렇게 입석대와 서석대를 만났다. 이 높은 산 위에 오랜 세월 우뚝 솟아있는 주상절리를 드디어. 병풍을 펼쳐 놓은 듯 반듯했고, 젠가 블록을 쌓아놓은 듯 아슬하면서도 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주상절리 없는 무등산을 생각할 수 있을까. 이것은 무등산이 무등산일 수 있게 만드는 핵심이었다. 광주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서석대 전망대에 서서 나는 궁금해졌다.
나를 나로 만드는 핵심은 무엇일까.
무등산의 핵심가치인 주상절리를 보며 마릴라의 브로치를 떠올렸다. <빨강머리 앤>에서 마릴라가 어머니에게 물려받아 아주 소중히 여기는 그 자수정 브로치를. 나의 어떤 인생철학을 나만의 브로치로 만들어 나의 딸에게 물려줄 수 있을까. 어떤 브로치가 나의 딸이 소중히 여겨 나의 손녀나 손자에게 물려질 수 있을까. 나의 그 무엇이 대대로 자손에게 전해져서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그들의 삶이 순간 따뜻해지는 그런 유산이 될 수 있을까.
하늘 가득 낮게 깔린 구름과, 이름은 모르나 위엄 있는 다른 주상절리와, 수많은 나무와 풀들이 있었다. 나는 이들과 같이 저 멀리 산이 만든 지평선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움직임을 멈춘 몸이 추위와 배고픔으로 인한 비상사태를 알릴 때까지. 서석대 정상석과 사진 찍기 위해 몰려든 등산객들로 전망대가 가득 찰 즈음, 우리는 아늑한 장불재 쉼터로 서둘러 내려갔다.
나는 오늘의 모든 순간이 나의 딸의 기억 속에 반짝이며 빛나길 바랐다.
힘들어서 무력해졌던 마음,
포기하고 싶었던 좌절감,
다시금 힘을 내는 용기,
응원을 받고 뜨거워진 인내심,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
결국 해냈다는 성취감.
멋진 풍경을 만든
자연에게 느낀
경이로움과 고마움,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즐기는 행복,
엄마아빠와 이 모든 걸
함께 해냈다는 연대감.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사랑과
온 우주에 대한 믿음.
그리하여 나의 딸이 오늘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산을 오르고 내리며, 자연을 보고 느끼며, 나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배우며, 평생 자산이 될 귀중한 가치를 오늘의 수업을 통해 만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