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풀 그리고 숲 Apr 09. 2020

기특한 소년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렇기에 운명이라 칭하는 걸 테지. 태어나 보니 그는 내 아빠였고, 그녀는 내 엄마였다. 그렇게 한참을 '당연한 우리 아빠', '당연한 우리 엄마'로 받아들이며 '당연한 내 부모'의 사랑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으며 자랐다. 아빠는 아빠니까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거라고, 아빠는 힘이 센 어른이니까 내가 다리가 저려 힘들 때 업어주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빠, 저 다리가 너무 아파요. 못 걷겠어요. 업어주세요."

등산을 하다가도 다리가 저려오면 두 팔 벌려 아빠에게 다가가면 되는 줄 알았다. 아빠의 넓은 등에 기대어 얼굴을 폭 대고 편안해하기만 하면 되는 줄만 알았다. 그렇게 아빠는 한참을 가장 큰 어른이었고 아빠였다.


갑작스러운 엄마와의 이별 뒤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내가 알던 어른도, 아빠도 없었다. 아빠는 나보다 힘들어했고, 훨씬 흐트러졌고, 엉망이었다. 어느 날은 든든한 아버지였다가 어느 날은 죄인이 되었다. 그러다 또 어느 날은 상처 받은 남편이었으며, 다른 날은 어린 딸에게 모진 말을 하는 어리숙한 남자였다.


"이럴 때일수록 채림이가 채민이 잘 챙겨줘야 해. 언니로서 의젓한 모습 보여줘야지."

"엄마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아빠가 죄인이야."

"아빠가 지금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너희까지 이러면 아빠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너네 없으면 아빠는 살 이유가 없어."

"나도 엄마 따라서 콱 죽어 버릴까? 뛰어내리면 그만이야."


술에 취해 엄마가 보고 싶다며 엉엉 우는 아빠는, 내가 알던 씩씩하고 힘이 센 어른이 아니었다. 아빠의 떨리는 어깨를 도닥이며 "아빠, 울지 마세요. 그럼 저도 속상해요"라고 말하던 그날 밤, 아빠는 두 딸의 아빠가 아니라 떠나보낸 아내를 그리워하는 한없이 안쓰럽고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빠를 아빠가 아닌 한 남자로 보게 됐다.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그리울까. 자기 마음 추스르기도 힘들 텐데 두 딸들을 챙기느라 얼마나 고될까. 마음 놓고 슬퍼할 시간도 이 남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구나 싶어 한참 동안 미안했고 안쓰러웠다. 그런 아빠 앞에서 나까지 울 수는 없었다. 아빠의 마음이 단단해질 때까지 눈물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해서도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빠 앞에서 울지 않았고, 단 한번도 '엄마'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아빠'라는 역할을 짊어지게 된 1958년생 인간. 나와 같은 10대-20대-30대라는 시간을 보낸, 그리고 나보다 조금 더 많은 날을 겪어낸 '나와 같은 사람'. 아빠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닌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로만 사는 사람. 그래서 기특하고 마음 아픈 사람….


아빠의 웃음이 유난히 천진난만해서 그런 건지, 나는 종종 아빠가 소년처럼 느껴진다. 소년의 미소에 이토록 짙은 주름이 웬 말인가. 그의 흘러간 청춘과 세월의 흔적이 야속하다. 50년대 후반 여름날, 태어나 눈을 끔뻑거리는 모습. 신나게 뛰어다니며 말썽 부렸을 어린 시절, 크디큰 포부를 다지며 세상과 싸웠을 청춘, 그러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거침없고 촌스럽게 구애했을 그때까지.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기특하다.


아빠의 고단한 인생의 단비가 되어주고 싶다. 아빠의 지친 영혼을 위로해주고 싶다.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고, 아빠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딸들이 있다고 말하고 또 말해주고 싶다. "사랑해요", "감사해요", "아빠가 최고예요", "아빠가 우리 아빠라서 좋아요"라는 말을 하고 또 해도 아쉬울 만큼.




아빠, 딸들이 열심히 열심히 살고 싶은 이유는 아빠 때문이에요. 우리 키우시느라 바친 아빠 청춘에 하나씩 보답할게요. 요즘 돈벌이 안 돼서 힘드실 텐데 당장 도움 못 드려 죄송해요. 얼른 수익 늘려서 도움 많이 드릴게요. 항상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그러니 늘 조심히 다니세요. 음주, 담배 줄이시고 운전도 조심. 안전벨트도 꼭 하시고요. 코로나도 조심이요. 사랑해요. 「2020년 3월 25일 수요일 오후 4시 3분, 아빠와 통화 후 보낸 문자메시지」

매거진의 이전글 오랜만에 일기를 펼쳐보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