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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드 큐레이터 서윤 Oct 18. 2023

엄마의 18번 노래가 귓가에 맴돌다.

박 일남  '갈대의 순정'



며칠 째 입가에 뱅글뱅글 도는 몇 마디 노랫소리가 있었다. 트로트인 것 같은데.. 그 순간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어릴 적 동네 시장 이모들과 관광버스에서 구성지게 노래를 불렀던 엄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마, 왜 있잖아~나 어렸을 때 시장 이모들이랑 관광버스 안에서 엄마가 부르던 그 노래 제목이 뭐였지? 요 며칠 계속 생각날 듯 날 듯하다가 가사가 뭔지 모르겠어. 어릴 때 엄마가 부르던 것 같아서요. 우리 엄마 참 노래 잘했는데.."

"오메, 우리 딸은 어쩜 나하고 똑같냐~ 갑자기 왜 그 노래가 생각이 났으끄나~ 그때는 갈대의 순정 불렀을 것이디."

"아, 맞다 맞아. 갈대의 순정" 엄마가 말해주는 노래 제목을 듣자마자 흥얼거리던 노랫말이 신기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

"너도 그 노래를 좋아한갑 보다 아~. 엄마 닮으면 고생한데 좋아하는 노래까지 닮았냐~"

좋은 것인지 싫은 것인지 엄마는 당신을 닮아가는 딸내미에게

"나는 닮지 말아야지 "

"우리 딸은 나처럼 고생 안 하고 살아야 헌데"

그 말만 계속 말하시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으셨다.


추석 때 친정에 가지 못한 나에게 바쁜 일 끝났으면 시간 내서 다녀가라는 말씀과 함께 엄마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비금도에 당신이 들어갈 툇자리를 함께 보러 가자는 말씀을 불쑥 던지시고는 며칠 집에 머무르면서 엄마랑 고향에 함께 다녀오자고..


'추석 때 집에 꼭 왔으면 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싶었다.

"너랑 한번 가고 싶다. 바람도 쐴 겸. 시간 낼 수 있겠냐?" 엄마의 목소리에 그리움의 표정이 느껴졌다.

"네.. 1주일 정도 정읍에 있을게요"


엄마 나이 열여덟에 떠난 고향이었다. 외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씩 비금도를 다녀오셨다. 거동이 불편한 외할머니 목욕을 시켜 주시며 "제발 자식들 고생 그만시키고 이제 그만 가시쇼.." 굽은 할머니의 등이 빨개지도록 밀어주시던 엄마는 눈물 고인 붉어진 눈을 연신 비비셨다.


외할머니는 오랜만에 찾아온 막내딸의 매서운 한 마디가 화살처럼 박히셨는지

"내가 빨리 죽어야 우리 새끼들 고생 안 할 것인지.. 미안하다"

"살갗이 아프다. 살살 밀어다오"

엄마의 매서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외할머니는 살갗이 아픈 게 아니라 막내딸의 한숨이 아프셨을 것이다.


한숨 쉬듯 내뱉던 외할머니의 굽은 등 너머로 보이던 엄마의 입가엔 꾹꾹 참고 있는 슬픔이 짓눌러져 있었다.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찾아갔을 때 외할머니는 나를 안으시며 우리 서윤이가 어느새 이렇게 컸느냐며 눈물을 보이셨던 모습이 내 기억에 남아있는 외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내 기억에 외할머니를 떠나보내면서 엄마는 많이 울지 않으셨다. 그저 잠시 이별인 것처럼 초연하게 받아들이시는 모습이었다. 거동이 불편하신 엄마가 더 이상 며느리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딸자식으로서의 마음, 인간으로서 최소한이라도 스스로의 일상을 견디실 수 있을 때 떠나시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외할머니의 나이에 접어드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찬서리처럼 매서웠던 그때의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자식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나이가 돼버린 엄마의 마음이 보여서. 스스로 당신이 들어갈 자리까지 잡아놓는 엄마의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려왔다.


갑자기 나와 비금도를 가고 싶으시다는 엄마는, 어쩌면 추운 욕실에서 빨갛게 등을 내주었던 그 밤의 외할머니가 보고 싶으신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어릴 적 엄마의 기억을 헤아리며 정겹게 단둘이 서로의 시간을 붙잡아보련다. 뜨거운 태양이 물러간 엄마의 고향 비금도에서 30여 년 전의 추억 한 자락을 꺼내며 엄마의 그리움에 나의 그리움도 얹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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