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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모 Dec 01. 2023

네컷의 서사

인생네컷 유랑기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인생네컷’이라는 것이 유행한 후로 친구들과의 모임의 마무리는 언제나 사진 부스 앞이었다. 술과 맛있는 안주를 곁들여 다음 날을 저당잡은 채 만취한 날, 오래간만의 만남에 적당히 알딸딸해 흥이 올랐던 날, 기분이 좋았거나 나빴던 각자의 일상을 화제 삼아 아메리카노를 마셨던 날, 언제나 모임의 마무리는 ‘인생네컷’이었다. 


그 날의 화두가 무엇이었는지에 상관없이 ‘인생네컷’을 찍을 때만큼은 모두가 아이스러워진다. 바꿔말하면 사회적인 체면을 벗어버린 채 고상한 척을 지우고 제멋대로 한다는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소품으로 무장한 채 사진을 찍고, 이목구비가 흐릿해질 정도로 뽀얀 보정을 하며 사각거리는 작두로 스티커사진을 잘라 나눠가졌던 10대를 지나온 이라면 누구나 ‘인생네컷’ 앞에서 멈출 수 밖에 없다.


일단 ‘인생네컷’에 입장을 하면 각자가 마음에 드는 소품을 고르기 시작한다. 늘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코트를 즐겨입는 SL은 요란한 머리띠와 반짝이 자켓을 골랐다. 그 날 생일인 HB는 티아라와 요술봉을 고르고 사진의 센터를 선점했다. 말수가 많은 DH는 하트 모양의 선글라스를 썼으며 나는 정체모를 뿔이 달린 머리띠를 집어 썼다. 온 동네의 인생네컷 부스에서 사진을 찍으며 이른바 ‘도장깨기’를 하는 HY는 소품이 없어도 자신있다며 당당히 맨몸으로 부스에 들어갔다. 무엇을 골라야할지 몰라 어물쩍거리는 SY는 결국 아무거나 집어들었다.


소품 고르기가 예고편이었다면 사진부스에 들어간 순간 본편이 시작된다. 부스 안에서는 그리 많은 대화가 필요치 않다.


“몇 장 뽑을까?”

“무슨 포즈 할까?”

“좀 더 붙어봐봐 친한 척!”

“나 이번엔 올라갈래!”

“야 이번엔 OO이 몰아주자!”

“포즈 바꾸자! 뭐 재밌는 거 없나?‘


그 날의 멤버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이 정도가 부스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전부이다. 한 컷이 찍히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20초. 그 동안 말을 외치는 이만 있고 분명하게 대꾸하는 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외치는 한마디마다 후다닥 움직이는 것을 보면, 우리는 분명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 맞기는 하다. 정신없는 8번의 20초 동안 멤버들은 가지각색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가지 표정으로 내리 8컷을 찍는 친구가 있는가하면 8번의 각기 다른 포즈와 표정을 보여주는 친구, 점잖은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익살스러운 행동을 하는 친구 등 모두가 각자의 민낯대로 사진을 찍는다. 


이렇게 혼란함과 웃음이 공존하는 160초가 지나면 최후의 네 컷을 고르는 하이라이트가 온다. 이때만큼은 다들 심사위원의 자세로 사진을 검열한다. 재밌는 것은 이 심사가 꽤나 후하다는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재고의 여지도 없이 삭제버튼이 눌려 휴지통에 버려졌을 사진들도 ‘추억’과 ‘재미’라는 명목으로 살아남는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네 컷은 누군가의 방이나 냉장고에 붙거나, 앨범에 꽂히기도 하며, 다이어리에 기록되기도 한다. 


사진 하단부의 QR코드를 찍으면 160초의 사투가 고스란히 촬영된 영상을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여기에는 살아남은 네 컷뿐만 아니라 모든 사진이 어떻게 찍혔으며,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시선을 주고받으며 웃었는지 그 분위기가 모두 담겨있다.



이렇게 모아온 네 컷 사진을 전부 세어보니 제법 두께감이 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만날 때마다 ‘인생네컷’을 찍는 것일까. 제법 의젓한 척을 할 줄 아는 어른이 된 우리가 어째서 네 컷 부스 앞에만 서면 귀여운 얼굴을 드러내는걸까. 


네 컷 안에는 우리의 서사가 담겨있다. 같은 시간대와 계절, 비슷한 추억과 감정을 공유하며 서로만 알고 있는 우리의 민낯이 담겨있다. 부스 안에서 누군가의 이상한 디렉션에도 별말없이 각자 알아듣고는 이내 포즈를 취할 수 있는 것,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아무 물건이나 골라 뒤집어 쓸 수 있는 것, 자연스럽게 어깨를 두르거나 팔짱을 끼는 것,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웃는 것, 얼굴이 찌그러져 있거나 기이한 표정으로 찍혀도 마구 웃고 넘어갈 수 있는 것. 이렇게 우리는 160초 안에 160초 그 이상의 진득한 시간을 담아낸다. 


네 컷이 출력되면 모두 부스 밖으로 나와 투명비닐에 사진을 넣고 가게를 빠져나온다. 부스 안에서는 그렇게도 활기찼던 우리인데 가게 밖으로 나옴과 동시에 약간의 피곤함이 몰려와 사진을 나눠 가지고는 이내 헤어진다. 와글거렸던 판타지 속에서 현실로 넘어오는 순간이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 멘트는 “다음에 또 찍자”이다. 다음이 언제인지는 모른다. 매일같이 카톡과 통화를 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이도 아니다. 그저 느슨하게, 정해진 모임날에 드문드문 만난다. 신기하게도 누구 하나 특별한 사정을 밝히며 빠지는 법 없이 참 성실하게도 모인다. 엉성하게 구멍난 겨울니트같은 우리 사이는 이런 식으로 꽤 오래 따뜻하게 이어져왔다.



누군가가 사진을 나눠가지고 헤어진 뒤 "사진 보니 우리도 이제 늙었더라"고 말했다.

맞다. 우리는 매일 늙어가고 있는 중이다. 다만 그와중에 네 컷안에 담긴 너와 나 사이의 역사가 꾸준히 이어지면 좋겠다. 그리하여 다음 만남 때에도 서로의 일상을 화제삼아 너와 나만이 공유하는 한 컷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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