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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모 Jan 05. 2024

열심의 함정

끝내주는 이들의 틈에서 무엇 하나 끝내지 못한 나를 마주한 순간


헬스 등록률이 1년 중 가장 높다는 1월, 나는 그들을 구경하기로 했다. 모두가 새해를 맞아 나름의 다짐을 하고 목표 리스트를 만들며 의지를 불태우는 것과는 반대로 움직인 셈이다. 말이 좋아 구경이지 실상은 발가락조차 움직이고 싶지 않아 가만히 앉아 주변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해마다 12월 내내 새해에 쓸 다이어리를 고르고, 12월 31일에는 지난 1월 1일에 적었던 위시리스트를 확인하며, 다음 날이 밝으면 온 집안을 헤집어 대청소를 하던 것과는 다른 선택이었다. 평소와 달리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이들에게는 “재충전을 할 생각이다”며 그럴싸하게 이야기를 했다. “열심히 달렸으니 나도 1월은 좀 쉴까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짐짓 모든 것을 계획하고 ‘쉼’조차 예정에 있던 일인 것처럼 말했지만, 모든 것은 솔직하지 못한 이의 과대포장었다. 계획된 휴식은 애초에 없었다. 그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작년 365일은 스스로의 능력치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나날이었다. 열심이 미덕이고 갓생이 추앙받는 사회에서 나에게 주어진 1인분의 그릇을 해내고자 무척이나 노력했다. 직장인과 대학원생이라는 두 가지 캐릭터를 가지고 하루를 쪼개 생활했다. 톰과 제리처럼 두 캐릭터가 충돌하는 날에는 머리를 쥐어 뜯거나 맥주 한 캔에 위로받았다. 논문을 쓰다 교수님으로부터 따끔한 피드백을 받은 날에는 일찌감치 자퇴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키보드를 두들겼다. 겨우 졸업을 하고 난 후에는 그 길이 내 길이라 철썩같이 믿으며 곧바로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틈틈이 운동과 연애사업, 모임, 대외활동과 취미생활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주변으로부터 바쁘게 산다는 평을 들을 때면, 다들 그러는 것 아니겠냐며 할만하다는 듯 여유있는 척을 했다.


나는 정말로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라, 일상을 촘촘히 꽉 채워 사는 것이 맞는 것이라 생각했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는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미라클 모닝, 직장인 갓생, 자기계발 등의 컨텐츠가 쏟아졌다. 새벽 4시 30분에 하루를 시작하는 변호사, 새벽 5시에 영어공부를 하는 디자이너, 의류 회사에서 일하며 사이드로 브랜드 런칭을 준비하는 패션 바이어, 퇴근 후 제2의 직장으로 출근하는 회사원까지. 세상에는 끝내주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은 매일을 전투적으로 살아냄과 동시에 자신의 일상을 멋있게 전시까지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러한 라이프스타일을 동경했고 그들의 추진력과 에너지를 보며 감탄했다. 그들의 삶을 이리저리 구경하다 나의 일상을 바라보면 세탁물이 가득 쌓여있는 빨래통처럼 느껴졌다. 벌여놓은 것은 많은데 온통 미해결상태였다. 끝내주는 이들의 틈에서 무엇 하나 끝내지 못하는 내가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던 차에 발목을 다쳤다. 직장에서 유난히 피곤하게 퇴근하던 날,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오늘 저녁은 아무것도 못하고 공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곧장 체육관으로 향했다. 잔뜩 피곤한 채로 몸을 풀 겸 줄넘기를 시작했고 오늘 치의 스트레스를 복기할수록 줄넘기의 줄은 점점 빠르게 돌아갔다. 그렇게 스트레스보다 운동의 힘듦이 더 커질 때 즈음, 발목이 꺾였다. 살면서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대차게 비명을 질렀다. 처음 느껴보는 통증에 잠깐 운동을 멈췄지만 오늘의 목표였던 1000개를 다 채워야한다는 생각이 들자 그런대로 괜찮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뛰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한달 간 깁스를 하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걷지도 서지도 못하는 이상한 몸 상태가 되어버렸고 난생 처음 연차를 썼다. 병원에 가니 발목을 지탱하는 큰 인대들이 찢어져 깁스를 해야한다고 했고 애인과 가족은 나의 미련함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날 저녁, 마음껏 움직이지 못할 한 달간 무얼하며 시간을 채울지 계획을 세우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깁스와 목발을 하고 걷다보니 모든 것이 평소보다 10배는 느려졌다. 줄어든 보폭이 답답했고 욕심껏 목발의 보폭을 넓게 딛다 넘어지기도 했다. 하는 수 없이 한달 간은 인생에서 가장 느린 스피드로 생활하게 되었다.

신기한 것은 느리게 움직여도 하루가 생각보다 유연하게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빠르게 출근 준비를 할 수는 없었지만 그 덕에 오히려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다리가 갑갑한 탓에 일도 공부도 이전만큼의 효율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할만했다. 운동을 하지 못하는 게 무척 아쉬웠지만 그 대신 가족들과 여유있게 저녁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활동량이 줄어든 탓에 오히려 집에서 책을 읽거나 OTT를 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전의 내가 꾸려나갔던 스피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무탈히 흘러간다는 것이 꽤 신기했다. 하루를 불태우듯 보내지 않아도, 24시간을 1.8배속쯤으로 빨리 달리지 않아도 별일이 없음을 그제야 느꼈다. 평생을 열심중독으로 살아온 나에게 그 한달의 경험은 무척 신선했다. 어떤 날은 ‘무엇때문에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쳤나’싶은 마음이 들어 조금 민망해졌고, 또 어떤 날은 방향성 없는 열심은 일종의 자학이라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와 매일 고군분투하던 작년이 끝나고 한 살을 더 먹은 지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여전히 일상을 단단하게 쌓아가는 끝내주는 누군가들을 동경한다. 또한 여전히 그들의 열정을 본받고 싶어하며 조용히 ‘좋아요’ 버튼을 누르기도 한다.


다만 지금의 나는 맹목적인 열심이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를 안다. 그리고 일상을 유영하기 위해서는 이따금씩 일시정지가 필요함을 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절전모드를 끝내고 나니 훨씬 개운해졌다. 다가올 계절들에는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정속주행을 하며 하루를 쌓아가려 한다. 그리하여 12월 31일 저녁, ‘올해를 제법 끝내주게 보냈다’며 자축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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