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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모 Jan 12. 2024

여행의 진실 혹은 거짓

생각정리하러 여행간다는 말

세상 돌아가는 것을 드라마와 영화로 배웠다. 그렇다. 드라마와 영화에 나오는 온갖 클리셰들이 현실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자주 한다. 또한 드라마에 한번 빠져들면 과몰입하는 경향이 있어 수만가지 로망을 가지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만들어진 로망 중 가장 판타지스러운 부분은 바로 여행에 대한 것이다.

주인공들은 생각을 정리한다며 여행을 곧잘 간다. 나는 교통편을 예약하고 일정을 체크하며, 여행 갈 짐을 챙기는 것 자체가 귀찮은데, 주인공들은 훌쩍 잘도 떠난다. 특히 말끔하게 풀셋팅된 모습으로 공항에서 캐리어를 끄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나의 여행과는 사뭇 달라 웃기기도, 감탄하기도 한다. 나의 여행은 드라마의 그들과는 다르게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복장과 큼지막한 배낭이 함께 한다. 그리고 여권사진의 단정함과 다른 모습으로 인해 외국 공항의 검색대에서는 긴장이 되기도 한다.


주인공이 여행지에 도착하면 많은 이벤트들이 생기지만, 그 중 가장 드라마적인 건 사랑이다. 여행지에서는 선량한 낯선 사람을 만나 운명같은 사랑에 빠진다. 주인공은 대개 비즈니스 차 출장을 왔거나 일상에서 소진되어 모든 걸 털고 싶어 여행을 떠난다. 주인공이 떠난 여행지에는 잘생긴 혹은 예쁜 상대가 있으며 우연같은 몇 번의 에피소드가 반복되면서 둘은 사랑에 빠진다. 일상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행지만의 낭만이 그들의 사랑에 엄청난 기여를 한다.


주인공은 여행을 하며 크고 작은 기쁨과 슬픔을 맛본다. 그러다 여행이 끝날 즈음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다. 그 후의 일상은 마치 새 사람이 된 듯 여행 이전과 꽤 다른 모습이다.


예전에 비해 현실적인 드라마나 영화가 많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여행에 대한 이미지는 대개 위와 같다.



여행은 정말 그럴까.

일상의 자질구레한 스트레스와 피하고 싶은 현실들에서 탈출해 떠난 여행지에서는 정말 드라마와 영화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여행을 하면서 번잡한 생각이 정리될 수 있을까. 다녀온 뒤의 나는 그전과는 조금 달라질 수 있을까.


오랜만의 긴 여행을 앞두고 세상의 온갖 낭만과 로망을 끌어안은 채 2주의 여행을 떠났다. 그간의 여행과는 조금 다르게 예쁜 옷을 두어 벌 챙겼다. 비행기에서 주로 하는 일이라고는 기내식 혼쭐내주기, 몇시간동안 자기, 테트리스만 하는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e북 리더기까지 챙겼다. 캐리어에는 욕심껏 가지고 있는 카메라를 모두 챙겨갔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누구나 예상하듯) 여행을 다녀온 나는 그 전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가지고 간 e북리더기는 비행기에서 잠깐 읽었으나 오랜만의 독서라 그런지 오히려 숙면에 더 도움만 주었다. 챙겨간 예쁜 옷은 날씨와의 눈치싸움에 실패해 딱 한 번 입을 수 있었다. 여행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짐이 늘어나는 법인데, 오히려 그 예쁜 옷을 챙기느라 다른 짐들의 자리가 모자라져서 오래된 짐 몇개를 버리기까지 했다. 운명같은 로맨스나 예상치못한 귀인을 만나는 일도 없었다. 어린시절부터 줄곧 내게 가장 폼나보였던 주인공의 대사는 '생각 정리할 겸, 쉴 겸 여행왔다'는 류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나의 오랜 로망에 배신당했다.

 

장기간 여행을 간다고 해서 생각이 정리되지는 않았다. 하늘이 기가막히게 맑아 감탄했고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으며 노을이 아름다웠다. 해변에서 비치볼을 하는 사람들과 손을 꼭 잡고 다니는 노부부들, 거리의 음악가들을 실컷 구경했고 맥주를 사마셨다. 먹고 싶은 것만 먹고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


그뿐이었다. 일상의 고민더미들과 생각이 정리되는 것은 없었다. 그저 생각이 안났다. 정말 희한하게도 아무 생각이 안났다.


처음 가본 여행지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구글맵을 열심히 본 것, 맘에 드는 곳을 만나면 사진을 찍은 것, 배가 고프거나 다리가 아프면 식당과 카페를 찾았던 것 외에는 공을 들인 것이 없다. 해야 할 일이 이 세 가지 정도로 심플해지니 오히려 그 외에 대해서는 신경쓸 일이 줄어들었다.



그러니 돌아온 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다. 아무 것도 생각한것이 없기 때문이다. 출발할 때의 취지와는 다르게, 이국적인 장소에서 일상의 것들을 잘 떠올려보고 단정하게 정리해온 것이 전혀 없었다.


여행에 대한 수많은 로망 중 그나마 현실로 쥘 수 있는 것은 "생각 정리하러 여행다녀왔다"는 것이었는데 사실이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하러 여행을 간다는 말은 틀렸다. 생각을 없애러 여행을 간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할 일이 줄어들고 눈 앞의 것들에만 충실해지니 생각이 적어졌다. 잡념이 적어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런지도 모르겠다. 여행지에서의 나는 일상에서의 나보다 몇 배는 단순하고 심플한 사람이 되었다. 보고, 먹고, 걷고, 감탄하고, 또 마시고를 무한반복하다보니 유일하게 든 생각은 "내가 이렇게 단순했나" 였다.


여행을 시작한 지 5일 즈음 지났을 때는 굳이 일상의 고민거리들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예쁜 옷만 입고 여행을 다니고 낯선 이와 자유자재로 소통하거나 영화같은 운명적인 이벤트도 없었기 때문에, 뭐라도 나의 로망 한 가지는 시도해보자는 심산이었다. 물론 결과는 참담하게 실패. 바닷가에서 자기 몸만한 유모차를 빙빙 돌리고 있던 아이에게 시선을 빼앗겨버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을 하려고 시도해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면 별 것 아닌 일인 것이다'라고 급하게 정리해버렸다.



결국 내 고민의 무게는 딱 그 정도만큼이었던 것이다. 기가 막힌 날씨와 분홍빛 노을, 가지각색의 사람 구경하기, 먹고 마시기, 귀여운 것 몇 가지 정도면 희석될 수 있는 정도였다. 하루가 심플해지자 일상에서의 짐덩어리같은 고민들은 '겨우 그까짓거' 쯤으로 여겨졌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다. 아무 것도 생각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하러 여행을 간다는 말은 틀렸다. 생각을 없애러 여행을 간다는 말이 더 맞는 쪽이다. 여행을 계획하고 짐을 챙기고 준비를 하는 그 귀찮은 과정을 감수하면서 영화에서 보았던 어떠한 낭만도 이루지 못했지만, 생각을 없애는 것이 여행의 매력이라는 것 만큼은 확실하게 알겠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나니 여행지에서는 별 것 아닌 일이라고 느껴졌던 고민조각들이 도로 나를 조여온다. 그럴 때는 갤러리를 켜서 잠시 낭만 속으로 도망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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