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때려친 모든 것들에 대하여
11월은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연말이라는 키워드가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12월과는 그 분위기가 다르다. 캐롤을 bgm삼아 연말 모임과 크리스마스로 조금은 들뜬 12월과는 달리, 11월은 담담하다. 다만 언제 한해가 이렇게 훌쩍 가버린건지 헛헛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맘때면 꼭 "올해 무얼 했나" 하고 곱씹어보게 된다. 그러다가 모든 것을 다 이뤄낸 듯한 이들을 보면 배가 아파 배탈이 날 것만 같은 날도 있다. 마치 엽기떡볶이를 먹은 뒤 아이스크림 대여섯개를 연달아 먹고 마무리로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들이부은 기분이랄까.
그들이 그 경지까지 오르는데 걸린 시간과 노력, 무한한 성실과 인내는 생각하지 못한 채 그저 그 타이틀을 탐하다 탈이 난다. 그 시기어린 급체 뒤에는 늘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 따라온다.
한 해를 거듭할수록 나에 대해 점점 알게 되면서 나 자체로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은 깨우쳤지만, 그것이 늘 '만족스러운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늘 뭔가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럽다고 말할 만한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살면서 시도했던 많은 것들은 바로 그 불만족스러움과 질투,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이 버무려져 시작하였다. 일상에 대한 불만족스러움과 호기심이 실행의 스위치였다면, 질투는 그 가속폐달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궁금해서 시작했다가 누군가가 부러워져 몰입했고, 그에 익숙해지면 애정이 사그라들었다. 이전에 비해 열정이 사그라들면 또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갔다. 그리고 다시 호기심-부러움-질투-몰입-권태기의 순서가 반복되었다. 그렇게 나는 프로찍먹러가 되었다.
비슷한 일상이 지겨워 평소 궁금했던 요가를 시작했다. 요가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운동이라는데, 나는 자꾸 나보다 더 자세를 잘 만드는 옆사람을 의식하였다. 저 사람보다 조금만 더 몸을 접고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여지없이 선생님께 들켰다. 매일 수련으로 요가가 익숙해질 즈음, 또 다시 새로운 운동에 관심이 생겼다.
이번에는 TV에서 많이 본 필라테스였다. 예쁜 여자들이 예쁜 옷을 입고 하는 운동이라는 잘못된 환상에 빠져 호기심이 생겼고 지체없이 운동을 등록했다. 필라테스를 하면서도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경쟁은 계속되었다. 기어이 옆사람보다 다리를 많이 찢거나 몸을 더 휘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익숙해질 즈음, 슬슬 흥미가 떨어졌다. 그 다음 운동은 복싱, 그 다음은 등산과 헬스, 그러다 크로스핏, 다시 돌아 요가로. 그렇게 하던 운동에 싫증이 날 즈음에는 새로운 운동에 기웃거렸다.
친구들이 전부 대학원에 진학하자 나만 뒤쳐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원을 갔다. 특별히 공부를 좋아했다거나 학문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다들 가는데 나만 안갈 순 없지" 하는 이상한 생각이 동기가 되었다. 그러다 난데없이 전공을 택했다. 결과는 말해 뭐해. 지적허영심을 채우고자 했으나 스스로의 지성이 부족함을 느낀 채 맛만 보았다.
취미를 갖게 된 동기도 비슷했다. 직장생활이 불만족스러워 여러 가지 취미에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9 to 6의 일상이 권태로우니 그 이후의 일상은 오롯이 내 것이길 바랐다. 베이킹, 그림, 각종 클래스, 모임, 운동, 사진, 스터디 등등. 많이도 헤맸다.
하물며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지금 떠오르는 굵직한 것들만 적으니 이 정도이다.
내가 했던 대부분의 시도는 무언가에 대한 불만족에서 출발하였다. 만족의 기준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며 그 기준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특정할 수가 없다. 아마도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경험들에서 비롯되었거나, 인스타그램의 화려한 이들에서 비롯되었을수도, 혹은 양육자가 정성스레 만들어놓은 편견일지도 모른다.
인생에 걸쳐 무수한 레퍼런스들을 흡수하며 단단하게 만들어진 "만족"이라는 허들은 상당히 불친절하다. 특히 나 자신에게 불친절하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비교군을 가까이에 두고 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오롯이 만족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스러움은 타인에 대한 질투심으로 연결되기 쉽다. 비교와 질투, 자기비난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쉴새없이 갖가지 것들을 찍어먹어보며 돌아다녀도 나 자신이 만들어놓은 "만족의 허들"에 부합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허상이었던 셈이다.
한가지 배운 점은 바로 찍먹의 맛이다. 실행의 동기가 질투이건, 호기심이건 일단 시작하고보면 나에 대해 알게 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또 무엇을 오래 할 수 있고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등을 직접 느끼게 된다. 이렇게 몸으로 느낀 감각은 머리로만 상상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가 잘할 것이라 확신했던 일에서 생각보다 성과가 미미할 수 있다. 혹은 반신반의하며 시도한 일에 뜬금없는 재능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렇게 스스로의 성향과 취향에 대해 알게 되고 '나'라는 사람을 바로 이해하게 되는 것, 찍먹의 맛이다.
무엇 하나 진득하게 하지 못하는 나지만, 그 덕분에 나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