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에 힘을 꽉 주고 말했습니다
배에 힘을 꽉 주니 왠지 뱃살이 딱딱해지면서 몸이 곧아진 느낌이었다.
이 정도 뻣뻣함이라면 상대도 내가 덜그덕거린다는걸 알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느낌 그대로 살려 잔뜩 꼿꼿한 자세로 말했다.
"못하겠습니다"
못하겠는 것을 못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아마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냐며 나를 타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지내온 시간 속에서 "못하겠다"는 일종의 금기어였다.
"할 수 있습니다" 나 "해보겠습니다" 류의 의지력 탑재 멘트가 미덕인 사회에서, 못하겠는 것을 못하겠다고 솔직히 말하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특히나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뒤따르는 달달한 칭찬과 인정의 맛에 강하게 길들여져있을수록 "못하겠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말이다. "못하겠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실패나 낙오와 같은 단어가 꼬리표처럼 붙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열 손가락 전부에 사탕반지를 낀 아이처럼 좋아보이는 것을 잔뜩 끌어안은 채 "해내보겠다"는 마인드로 살아왔다.
"좋아보여서", "갖고 싶은 타이틀이라", "관심이 있어서" 뛰어든 일이 있었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다보니 그에 대한 도피처로서 덤빈 것이기도 했다. 도피처가 달콤했더라면 참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맞지 않는 곳이었다. 내가 그 일을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직감했지만 "해내겠습니다"의 미덕을 충실히 지켜온 나는 이번에도 기어이 해내려다가 그만 체했다.
늘 그래왔듯 버티고 참아낸다면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왜 그렇게까지 버텨내야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그렇다. 내 열 손가락에 잔뜩 끼워진 사탕반지들은 알록달록하고 달콤하며 예뻤으나, 내가 좋아하는 맛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나만의 이유와 동기보다는 그저 해내야만 한다는 목적에 의해 움직이다 탈이 난 것이었다.
결국 몇 일을 고민하다 "더는 못하겠다"고 고백하였다. "죄송하지만 안되겠습니다"는 상투적이지만 솔직한 말과 함께 상황설명을 하고 미리 신중히 생각치 못한 점을 사과했다.
그리고는 몇 달 간을 푹 퍼져버린 수제비처럼 지냈다. 잔뜩 쳐져있다가, 무언가를 다시 해보겠다며 덤볐다가, 금새 식었다가, 다시 타올랐다가를 무한반복하다가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상의 밸런스가 깨진 느낌도 들었다. '무언가를 해낼만한 잠재력이 있는 나'의 상태에만 젖어든 채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상태로 남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에 대한 후회는 들지 않았다.
못하겠다고 말한 이후로 내가 염려했던 것 만큼 나쁜 상황은 없었다. 누구도 나에게 실패했다거나 경기에서 낙오했다는 식의 비난을 하지 않았다. 가까운 이들은 "내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충분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덜 가까운 이들은 내가 무언가를 지속하거나 말거나 큰 관심이 없었다.
포기선언 이후 힘들었던 것은 그저 스스로의 방향에 대한 고민과 자기비난으로 고장이 나버린 내 마음이었지, 무언가를 놓아버렸다고 해서 내 인생에 지장이 생기지는 않았다.
우울한 와중에 꽤나 큰 깨달음이었다.
스스로의 역량을 너무 좁게 한정짓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릇에 비해 담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그릇이 넘치는 것 또한 문제이다.
못하겠는 것은 못하겠다고 말하자. 걱정했던 것 만큼의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떠오르지 않는다면 찾아보자.
다 먹지 못할 만큼의 사탕 한 움큼 손에 쥐고 있다가 전부 녹아 손이 찐득해져버리는 일이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