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칭얼대며 보챈 손자가 잔다. 잠이 오는 이유를 모르고 잠과 싸우더니 쪽쪽이를 물고 잠이 들었다. 우유가 나오지 않는 쪽쪽이를 열심히 빨아대다가 잠이 든다. 젖을 먹을 때는 몇 번 빨다가 잠을 자는데 젖이 안 나오는 쪽쪽이는 열심히 빨아댄다. 젖이 나오기를 바라는 건지, 젖이 나올 때까지 빨겠다는 건지 열심히도 빨아댄다. 이제 막 태어난 어린 손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신기하다. 딸은 밤새 몇 번을 깨서 젖을 먹이고 트림을 시키며 고생해서 인지 소파에 누워 쉬고 있다. 고운 햇살이 창문을 통해 집안을 환하게 비추는 평화로운 아침이다. 세상은 봄의 물결로 찬란하게 빛나고 희망이 넘친다.
딸이 사는 동네 가까이에 쇼핑센터가 있어 운동하러 나가서 잠깐씩 들려서 반찬거리를 사가지고 오기도 한다. 어제는 생선을 좋아하는 딸과 사위를 위해 대구를 사 왔다. 대구 매운탕에 고추장을 풀고 얼큰하게 끓이면 맛있는데, 산모에게는 맵지 않은 매운탕이 좋을 것 같아 고춧가루 없이 하얗게 끓였다. 맵게만 끓여 먹던 매운탕을 하얗게 끓이면 어떤 맛일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맛있다. 멸치와 다시마로 국물을 내고 두부와 무, 버섯, 호박과 양파와 파프리카를 넣는다. 여러 가지 야채를 넣고 끓이다가 생선을 넣어 익히고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했다. 마늘과 생강을 넣고 후춧가루를 조금 넣어 맛을 보니 맵고 짠 매운탕보다 훨씬 맛이 좋다. 고춧가루와 고추장 없이도 순하고 담백하고 먹고 나니 속도 편하다. 매워야 제대로 된 맛이 날줄 알았는데 고춧가루를 넣지 않고도 근사한 대구탕이다. 고춧가루를 넣지 않고 대구 매운탕을 만들 거라고 했더니 딸과 사위가 의아해했는데 막상 맛을 보고 너무나 맛있다고 몇 번을 더 먹는다.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조금씩 두려워한다. 특히 안 먹어본 음식은 낯설어하며 거부하는 습성이 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곳 사람들이 즐겨 먹는 배가 한국 배와 생김새와 맛이 달라 몇 년 동안 먹을 생각도 안 했고 그런 배를 먹는 그들이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그 배를 먹어볼 기회가 있어 먹어 보았더니 생긴 것만 다를 뿐 맛은 오히려 한국배 보다 더 달고 부드러웠다. 그 뒤부터는 한국배를 고집하지 않고 사서 먹는다. 선입견이란 어찌 보면 기회를 거부하는 것이다. 마음을 열고 사물을 대하면 더 많은 선택권이 주어진다.
길도 매번 가는 길을 좋아하고 옷도 즐겨 입는 옷이 따로 있다. 좋은 옷은 자주 안 입고 옷장에 걸려있는데 편한 옷만 자꾸 입게 되다 보면 낡아 버려야 하는데도 버리지 않는 경우도 생긴다. 그것뿐이 아니고 신발도 자주 신지 않은 멀쩡한 신발은 신발장에 모셔두고 허름하고 편한 구두만 신고 다닌다. 요즘 물건은 싫증이 나서 못쓰지 떨어져서 못 쓰지는 않는다. 무명천으로 옷을 지었던 시대는 구멍이 나거나 해지면 바느질을 해서 덧붙여서 입었는데 요즘 천은 웬만 해선 떨어지지 않는다. 청바지 하나 사면 체형이 바뀌지 않는 한 오래도록 입을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은 브랜드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오래 입는다. 겨울에 아무리 추워도 내복을 안 입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추워서 발발 떨면서도 뚱뚱해 보이는 게 싫어서 얇은 스 타킹만 신고 추운 겨울을 냈는데 그것도 한때인 것 같다. 지금은 추우면 무엇이든지 껴입고 다니고 배고프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맛있게 먹는다. 웰빙이라고 따지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런 것 따지지 않고 골고루 이것저것 먹고 소화 잘 시키면 그것이 바로 웰빙이다. 기름진 음식도 채소와 함께 꼭꼭 씹어서 먹으면 살이 되고 피가 된다.
체지방 어쩌고 하면서 아침은 커피 한잔으로 때우고 점심에는 배가 고파서 폭식을 하게 된다. 점심을 많이 먹고 나면 식곤증으로 졸음이 쏟아지고 능률은 더 떨어진다. 바쁜 생활에 삼시 세끼 꼬박 찾아 먹지는 못해도 먹는 재미도 있어야 삶이 재미있다. 우연히 만들어 본 하얀 대구탕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아무튼 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지듯이 늘 해 먹던 음식을 간혹 조금씩 바꿔서 시도해 보면 새로운 맛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음식만이 아니고 늘 가는 길만 고집할게 아니고 한 번씩 다른 길로 돌아가면 새로운 경치를 만난다.
오늘은 골목길을 통해서 난 길로 걸어야겠다. 가다가 길이 막히면 돌아 나오면 되고 전혀 모르는 길을 만나 길을 잃으면 조금 헤매다 보면 길은 또 찾게 된다. 지구는 둥글고 세상은 통한다. 길을 잃어버릴까 봐 같은 길만 간다면 저 넓은 세상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들을 만날 수 없다. 같은 나무 같아도 다 다르고 같은 꽃 같아도 모두 다르다. 오늘은 이 나무와 악수를 하고 내일은 저 꽃을 바라보고 싶다. 발걸음 닿는 대로 걷다 보면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일 것이다. 음식도, 길도, 사람도,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부닥쳐 보고 싶은 객기가 생긴다. 이야기가갈피를 못 잡고 중구난방이 되었다. 봄이라서 그런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