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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ng Sook Lee Dec 19. 2024

눈이 오면... 추억도 온다


세상이 온통 하얗다. 새벽부터 오는 눈이 하루종일 내릴 것 같이 계속 내린다. 어디서부터 오는 눈인지 비틀거리며 온다. 반기는 사람도 없는데 급하게 와서 자리를 잡는다. 더러는 쌓이고 더러는 바람 따라 거리를 방황한다. 초대받지 못한 사람의 모습을 닮은 것 같다.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도 다녀가야 한다며 할일을 한다.  나무 위에도, 자동차위에도 하얗게 쌓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어깨와 머리에도 앉는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사람들은 저마다 연 준비로 바쁘고 길거리에는 오고 가는 차들이 넘쳐난다. 말로는 불경기를 외치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언가를 사기 위해 쇼핑센터로 향하는 것을 보면 호경기인 것 같다. 크리스마스가 뭐길래 저렇게 난리 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나도 젊었기 때문에  연말이 되면 괜히 마음이 들떴다. 아이들 선물도 사고, 주위에 사는 이웃들에게 줄 선물 사느라 정신없이 바빴는데 지금은 한가롭기도 하지만 연말이라고 특별히 마음이 들뜨지도 않는다.


평소에 아이들이 갖고 싶어 하던 선물을 사서 예쁘게 포장해서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 놓고, 굴뚝을 타고 내려오는 산타 할아버지를 위해 벽난로 옆에 우유와 쿠키를 놓았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이 잠든 사이에 살그머니 몰래 내려와서 산타 할아버지 대신에 내가 쿠키와 우유를 마시고 시치미를 뗀다. 설렘으로 밤잠을 설치고 이른 새벽에 일어난 아이들이 “산타 할아버지가 쿠키와 우유를 먹고 선물을 주고 갔어’. 하며 좋아서 선물을 열어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손주들이 그 나이가 넘었다.


눈이 바람에 춤을 추며 온다. 이런 날은 벽난로 앞에서 장작불 타는 소리를 들으며 불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눈이 오면 눈을 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낭만도 있어 겨울도 좋다. 추우면 집안에서 밀린 일을 하는 즐거움도 있고, 장작불에 맛있는 고구마나 밤을 구워 먹는 것도 겨울의 낭만이다. 빨갛게 타오르는 장작불는 지난날들의 크고 작 추억보따리가 들어 다. 아파트에 살 때, 김장한 김치를 베란다에 놓고 자고 일어나 보니 밤새 눈이 내려 자동 김치 장고가 되어 겨울 내내 맛있게 먹었던 기억도 나고, 차를 아끼려고 추운 겨울에 걸어가다 얼어 죽을 뻔한 기억도 난다.


벽난로에서 타는 장작이 따다닥 하며 불길이 퍼진다.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은 생각나는 추억 속의 사람이 있다. 오래전 어쩌면 거의 40년 전의 일이다. 우연한 기회에 성당 교우이던  그녀의 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흘러서 왜 갔는지 모르는데 어렴풋이 깔끔한 그녀의 집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당시 그녀는 성당에서 봉사를 하며 바쁘게 신앙생활을 하던 때였다. 대화 도중에 성당에서 하려는 바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어 혹시 아이들 타고 노는 장난감 말이 있으면 사고 싶다고 하며 헤어졌다.


그 뒤로 바자회는 끝나고 겨울이 다가오는 어느 날, 중고물건을 파는 신문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내가 원하는 말이 좋은 가격에 나와 있는 게 보였다. 새것을 사주면 좋겠지만 아이들은 금방 자라기도 하지만 그때 당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던 시절이라 새것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침 겨울이 다가오고 아이들이 집안에서 재미있게 놀 수 있어 바로 그날로 사다 주었더니 아이들이 뛸 듯이 기뻐하던 모습이 보인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이 신나게 말을 타며 노는 것을 보는 행복한 저녁이었다.


눈발이 날리고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는 저녁 한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눈이 오는데 특별히 올  사람도 없는데 누군가 하고 나가 보니 그녀가 커다란 박스를 가지고 와서 문 앞에 서있다. 안으로 들어온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은 몇 주 전에 이야기 한 장난감 말을 사가지고 온 것이다. 이미 우리는 말을 사서 아이들이 신나게 타고 노는 것을 본 그녀는 조금 머물다가 선물로 사 온 말을 가지고 가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녀의 마음에 담긴 장난감은 안 받았어도 마음으로 받았기 때문에 너무 행복했다.


그녀를 만나면 이상하게 그때 그 눈 오던 추운 날, 귀한 장난감 말을 가져왔던 생각이 나서 친근감이 갔다. 하지만 그때 당시 그녀는 개인 사정으로 만날 기회가 없어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어쩌다 우연히  만나면 변함없는 마음으로 우리 부부를 동생처럼 대해주시며 안부를 물으시고, 우리도 역시 친절하게 대해주는 그녀가 좋아 따르며 세월이 갔다. 그녀는 1960년대 후반에 캐나다에 이민 온 대선배이고 실력이 좋아 연세가 많으신데도 여전히 사회적으로 활동을 많이 하신다.


요가를 비롯하여 영어 원서를 가르치고 여러 학식이 많아 많은 곳에 강연을 하며 강사로 활동을 하고, 시간 나는 대로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바쁘게 사신다. 그런 그녀를 만날 때마다  오래전 우리가 힘들었던 시절이 생각나서 고마움이 더해진다. 사람들은 나눔과 봉사를 말로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동참하는 마음으로 행동에 옮기며 사신 그녀의 삶은 잘났다고 나서지 않아도 빛이 난다.


사람이 한평생 사는 동안 가슴속으로 감사하며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행운이다. 오랜 이민 생활 속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인연을 이어간다. 좋았다가 싫어지는 인연도 있고, 싫었다가 좋아진 인연도 있고, 만남이 길고 짧은 인연도 있다. 나에게 잘해주어도 내키지 않는 인연도 있고, 멀리서 보고 있어도 정겨운 인연이 있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따스함이 전해지는 사람이 있고, 매일 만나도 서먹한 사람이 있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어쩌다 우연히 만나도 늘 반갑고 따스한 눈길을 가진 그녀는 내 가슴에 산다. 천천히 내리던 눈이 쌓여 길거리가 보이지 않는다. 눈이 쌓이고 그 눈이 녹기를 반복하다 보면 봄이 온다. 세월 따라 사노라면 잊히는 것이 많아지는데 눈이 오는 이런 날에 변함없이 찾아오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준 그녀에게 행운을 빈다. 지나가는 한마디의 말이 가져다준 귀한 인연에 감사하는 하루가 간다. 눈이 오면 추억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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