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페인 크룩(KRUG)을 사랑하는 세가지 이유
상상해보자. 당신은 무인도에서 평생 살아야 한다. 그리고 단 한 종류의 와인만 가져갈 수 있다. 다행히 수량은 평생 마실 수 있는 양이다. 그렇다면 어떤 와인을 가져가겠는가? 느닷없이 무인도에 왜 가냐고? 상황에 너무 몰입할 필요는 없다. 그냥 재미 삼아하는 것이다.
나라면 샴페인 크룩(Krug Grand Cuvee)을 가져가고 싶다.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레드나 화이트 와인보다 샴페인을 선택하겠다. 왜냐하면 와인 중에서 어떤 상황이나 어떤 음식에도 잘 어울리는 것이 샴페인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샴페인만으로 페어링(Pairing)한 특별한 디너를 경험한 적이 있다. 아뮤즈 부셰, 오르 되브르, 앙뜨레, 디저트 순으로 서빙되는 코스 요리에 맞춰 여러 종류의 샴페인을 페어링 하였다. 전채 요리에는 산뜻하고 가벼운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 샴페인이, 메인 요리에는 풀 바디의 묵직한 로제(Rose) 샴페인이 잘 어울렸다. 이날의 백미는 마지막 디저트였다. 쿰쿰한 치즈와 오래된 올드 빈티지(Old Vintage) 샴페인을 같이 내었는데 그 궁합이 기가 막혔다.
또한 샴페인은 다양한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내가 속한 와인 동호회의 지인은 족발에는 샴페인(족샴)이라는 확고한 철학을 갖고 계신다. 이 경우에 샴페인은 고급일 필요는 없다. 그분의 추천 샴페인은 대중적인 모엣 샹동(Moet & Chandon)이다. 지인과 함께 배달시킨 족발과 모엣 샹동을 마셨는데 의외로 잘 어울렸다.
둘째, 세상에는 맛있고 매력적인 샴페인이 별처럼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 단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크룩을 고르겠다. 이유는 우선 가장 안정적인 맛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샴페인은 크게 나누면 여러 해에 생산된 포도를 섞어서 만드는 넌 빈티지(NV) 샴페인이 있고, 특정 해의 포도로만 만드는 빈티지 샴페인이 있다. 이 중에서 빈티지 샴페인이 아무래도 고급이고, NV은 샴페인 하우스별로 가장 대중적인 엔트리급에 해당된다.
그러나 크룩 NV은 다르다. 매해 달라지는 품질의 편차를 최소화하기 위해 10개가 넘는 빈티지와 120여 종의 베이스 와인을 블렌딩 한다. 그래서 Non Vintage가 아니라 Multi Vintage라고 부른다. 또한 최대 15년까지 오래된 리저브 와인들을 함께 블렌딩 하고, 병입 후에도 6년 이상 숙성하여 출시한다.
셋째, 마지막으로 크룩은 오래될수록 맛있다. 크룩 그랑 퀴베는 1978년부터 만들어졌다. 오랜 역사와 함께 현재까지 총 6번 라벨이 변경되었다. 만약 어느 와인샵에서 오래된 라벨의 크룩을 발견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구입하기를 추천한다. 잘 익은 크룩 하나 열 빈티지 안 부럽다.
크룩 라벨 변천사 (괄호 안은 출시 연도)
1세대 (1978-1983) 빨간색 테두리, 8 각형 라벨
2세대 (1983-1996) 테두리가 얇아지고 라벨 바탕이 연해짐(pale yellow)
3세대 (1996-2004) 진한 골드 라벨 + 빨강 바탕의 골드 KRUG 글자
4세대 (2004-2011) 4 각형 라벨, 연한 꽃무늬, 코르크에 code 인쇄
5세대 (2011-2016) 라벨 단순화, 처음으로 ID code 도입
6세대 (2016-현재) Edition number 도입
2011년 이후에 출시되는 크룩은 아래의 사진과 같이 ID code를 갖고 있다. 크룩 홈페이지에 들어가 코드를 입력하면 내가 마신 크룩의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다. 내가 마신 크룩 168 EME EDITION은 11개 연도에 생산된 198개의 와인들을 블렌딩 하였다. 가장 어린 와인은 2012년이고 가장 오래된 와인은 1996년에 생산된 것이다. 피노 누아 52%, 샤도네이 35%, 피노 뮈니에 13%의 비율이다.
얼마 전에는 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었다. 지인이 음식을 준비하고 와인은 각자 1병씩 가져왔다. 이때 마신 와인 중에 크룩 4세대가 있었다. 크룩 4세대는 2004년에서 20011년에 출시되었으니,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샴페인의 황금 빈티지 와인들이 블렌딩 되어 있을 것이다. 보관 상태도 좋았다. 향부터 맛까지 샴페인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을 주었다. 크룩이 첫 잔이었는데, 첫 잔을 마시고 나니 너무 행복해져서 그 이후의 음식과 와인은 오히려 기억이 흐릿하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았다. 크룩을 원 없이 마시면서 크룩과 함께 익어가는 삶, 무인도여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