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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양부인 Nov 19. 2021

[사색] 엄마가 몰랐던 사실

초미니 단편소설



오후 네시의 따가운 햇살

나는 눈 시리도록 좋았다.


철제 벤치에 널브러져서

잔잔한 바람의 숨결을 가만히 느꼈다.


요 며칠 가을장마로

뼛속까지 파고들었던 눅눅한 곰팡내를

이제야 제대로 말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맑게 갠 하늘은

그늘졌던 내 마음도 뽀송하게 어루만졌다.

아마 다른 애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벤치에 함께 걸터앉아 있지만

서로 적당한 거리를 지키

각자의 여유를 즐긴다.


개인의 소중한 시간을

서로 존중하기 위함이다.


오후 네시의 볕은

따뜻한 자비를 베풀었고

그렇게 우리 모두 나른해져 있었다.

저놈이 막 들어오기 직전까지는...







저놈은 항상 폭력적이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나있고 불만인지,

늘 거친 날숨을 씩씩 거리며

사방을 분주하게 싸돌아다닌다.


저놈이 쿵쾅쿵쾅 바닥을 울리며

한 걸음씩 다가올수록

내 심장도 덩달아 땅밑으로 내려앉는다.

언제나 저놈의 타깃은 나였기 때문에.


여유롭던 오후 네시의 벤치에도

일순간 긴장감이 흘렀다.

그러나 너희들은 마저 즐겨라.

오늘도 역시 내가 당첨될 테니.


이번에도 놈은

사정없이 내 멱살을 잡아채고는

벤치 밖으로 끌어내렸다.







이놈이 얼마나 무례한 놈인가 하면,


그 단단한 주먹 안에 내 옷깃을

마구 욱여넣어 움켜쥐면서도

여태껏 나를 똑바로 쳐다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니, 옛말에 왜

그런 속담도 있지 않은가.

적에게 등을 내보이지 말라고....


뒤에서 비수를 꽂을 수도 있으니

방심 말라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무심하게 여기저기 질질 끌고 다닐 만큼

나는 놈에게 있어 아주 가볍고

하찮은 존재라는 뜻 되겠다.







놈은 나를

화장실 앞에다 보기 좋게 패대기 쳐놨다.

자주 있던 일이라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무릇 화장실이라는 데가

원래 그렇지 않은가.


은밀하고.

개인적이고.

누구도 개입하거나 선을 넘지 않도록

합의된 금단의 영역.


그런 곳에 넘어져 있는 나를

일으켜줄 손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

나는 이번에도 눈을 질끈 감고

단념해버렸다.







놈이 나를 밟기 시작한다.


화장실 바닥의 습기와

성분을 알 수 없는 물기와

놈에게 묻어 있던 타액 한데 뭉쳐

나를 흠씬 두들겨 팬다.


더럽고 추악한 기운이

내 몸을 삼키려고 달려드는 것 같다.


놈이 나를 이리저리 굴리며

발로 쿡쿡 쑤시면서 밟아대는 것은

차라리 견딜만하다.


나는 오히려

저 눅눅한 병균이 내 몸에 붙어

암이라도 생기는 건 아닐지

그게 더 찜찜함하고 신경 쓰일 뿐.







한참이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젠장.

아까 놈에게 멱살만 잡혔을 때보다

수 천 배는 더 주름지고

뭉개져 버렸구먼.


나는 축축하게 젖은 몸을

쥐어짜 볼 힘은커녕,

혼자 일어날 여력도 없었다.


만약

내가 아직 벤치에 앉아 있고,

놈에게 여기로 끌려온 게 다른 이라면

사정이 좀 달랐을까?


에잇, 됐다.

기대를 품지 않는 게 낫겠다.

우리는 항상 함께 있지만

서로 간의 적당한 거리를 지켜왔으니.







갑자기 놈이 다가와서

나를 일으켰다.


한 번 밟고 나면

더럽다고 나를 만지지도 않던 놈이

웬일로?


아...

놈의 여자가

여기로 오고 있는 모양이다.


놈은 내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주름 가득 구겨진 몰골을

이제 와서 정돈해주었다.


제 아무리 폭력적인 놈이라도

그녀에게 제 본성을 들키기는

싫었던 것이다.







그녀는 영 눈치 없는 맹꽁이는 아니었다.


화장실 앞에 각 잡힌 자세로

반듯하게 엎드려있던 나를

경멸의 눈으로 흘깃 쳐다보는 것이다.


딱히 동정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의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에

나는 좀 억울해졌다.


그녀는 마치

내게서 무슨 악취라도 풍긴다는 듯

굳이 까치발을 들고

양쪽 다리를 크게 벌려가면서

문 앞에  엎드린 나를 어색한 자세로 넘어갔다.


그러더니 이 여자,

손만 냉큼 씻고 화장실을 나올 적에도

최대한 내게 닿지 않으려고

까치발로 돌아서 나오는 게 아닌가.


들릴 듯 말 듯

"더러워"라고 말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벤치에서 햇살을 쬐며 누렸던 사치가

불과 한 시간 전의 일인데

순식간에 걸레 취급이라니.


나는 이게 원래 내 냄새가 아니라고,

너의 남자 놈이 나를 밟아서 생긴

그놈의 발냄새라고 해명하고 싶었다.







"저건 좀...... 그렇지 않아?

 너, 이렇게 살면  병 걸려."


"아! 치울게, 치울게.

 나도 이제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었어."







놈이 머쓱해하며

나를 꼬집어서 들어 올리더니

또다시 어디론가 끌고갔다.


이번에는 쓰레기통 옆이다.


그리고는 어떻게든 나를

쓰레기통과 최대한 밀착시켜 놓으려고

발로 마구 밀면서 다시 구겨 놓는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쓰레기통은

거울처럼 내 몸에 아로새겨진 글씨를

무심히도 읽어냈다.







2018년 6월 15일생 유준이 엄마는

짐작이나 했을까?


유준이의 첫 생일을 축하해줬던

그녀의 지인 중 누군가는

날마다 젖은 발로 아이의 예쁜 이름을

무던히도 짓밟았다는 내막을......






수건에 대한 고찰


화장실 문 앞 발수건을 마구 구겨놓은

동거인의 만행을 목도하며

수건을 고이 접으면서 쓴 

초단편 소설이다.


아빠 가게 개업식 기념 수건인데,

때가 묻어도 티가 덜 나는 색깔이라는 이유로

언제부턴가 발수건이 되어 버렸다.


수건 빨래를 할 때는

모든 수건을 한 통에 넣고 같이 돌리는데

어찌하여 말리고 나면

저마다의 역할이 달라지는가.


누가 저 아이를

발수건으로 함부로 다뤄도 된다고

규정했느냐는 말이다.


아빠 미안.


그런데 다시 생각해봐도

돌잔치 답례품으로 수건은 좀 별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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