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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로 Oct 04. 2020

아내의 책장을 정리 하다가 문득...

신박한 마음 정리 (feat. index tab)

정신치료는 산란한 마음을 정리하는 작업 © 2020 Roh.

아내의 책장을 함께 정리했다.

소임을 다한 오랜 책들은 곧 버려질 운명이었다.

대학 때 보던 교과서들도 명예롭게 은퇴를 명 받았다.

그런데 책마다 알록달록 촘촘히 붙어있는 인덱스 탭들이 눈에 띄었다.
순환기내과 같은 메이저 과목뿐 아니라, 예방의학 같은 마이너 과목까지도 예외가 없었다.
신속히 찾아보며 공부의 효율을 높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순수하게 몰입했던 한 여대생의  열정이 느껴져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손길 주지 않아 서먹했던 과거의 내 책들에게 공연히 미안하기도 했다.
애초에 ‘21세기를 이끌어갈 인재상’을 받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편으론 지금의 삶이 쉽지 않겠다 싶다.
저리도 꼼꼼했던 의대생이,
나같이 좌표도 나침반도 없고,
뒤죽박죽 인덱스란 없는 인생과 살려니 얼마나 답답할꼬?

생각해보면, 정말 인덱스가 필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다.
마음을 들여다보노라면,  

찾으려 해도 도통 보이지 않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찾았다 해도 무엇인지 모른다.


정신적인 트라우마는 기억에 큰 혼란을 일으킨다.

그 상황을 흔히  ‘쏟아진 옷장'에 비유한다. 주 1)

갑자기 옷장이 넘어지면, 우리는 놀란 나머지 조급하게 대처하곤 한다.

옷장을 급하게 일으켜 세우고, 옷가지를 그 안으로 우겨 넣고는 문을 닫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옷가지들로 조금만 건드려도 옷장 문은 다시 열리게 된다.

이것이 사소한 자극에 갑자기 외상 기억이 떠오르는 플래시백이다.

트라우마의 치료는 쏟아진 옷장을 다시 정돈하는 것과 같다.

뒤죽박죽이 된 기억을 재처리(reprocessing)하는 작업이다.

즉 옷가지를 하나씩 빼서 차곡차곡 정리해 넣으면 된다.


우리 마음은 트라우마가 아니어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뒤죽박죽 엉클어진다.
상처 받은 내담자의 마음은 흐트러진 한 무더기의 종이 더미와 같다.

정신과 진료는 산란한 마음에 인덱스 붙이는 작업이다.
치료자는 내담자와 함께 들쭉날쭉 엉클어진 마음을 나란하게 고른다.
순서를 맞추고, 중요한 곳을 표시하고, 인덱스에 이름을 적어 넣는다.
무엇이라 부를지 몰랐던 마음 한 부분을 명명한다.

한아름이던 마음이 어느덧 한 손에 쏙 들어온다.
갈피를 잃은 마음들이 가지런하다.

혼자보다 함께하니 한결 수월할 수밖에.


자꾸 흩어지면 억지로 붙잡고 있을 필요도 없다.

풀이나 접착제를 사용하는 것도 빠르고 합리적인 방법이다.

약물치료도 마찬가지이다.

맨손으로 정리하지 못했다고 공연히 자존심 상할 이유도 없다.

가든하게 정리해서 편하게 사용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혹 중간에 한 두 장 잃어버렸어도 괜찮다.
잘 정리된 인덱스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혹, 지금은 마음 한쪽이 이해가 안 되더라도 상관없다.
언제든 꺼내서 찾아보고, 다시 덮으면 그만이다.

젊은 날 내 책 앞에서는 소홀히 하더니,
잘 보이지도 않는 두꺼운 ‘남의 책’에 인덱스를 붙이며 살게 되나 보다.

내 마음에도 인덱스를 붙일 수 있다면 좋겠다.
며칠 전 속상했던 마음도 살펴볼 수 있고,
그리웠던 시절도 얼른 꺼내볼 수 있으니까.

인덱스 장인인 아내가 잘 붙여주겠지.

혹시나 지금의 내 몸에 인덱스를 붙이려 한다면,

음... 그것은 좀 문제다.
허리와 배의 위치부터 점점 확인이 어렵다.
무엇보다, 머리가 도통 제자리에 잘 붙어 있는지 몰라서 난감하다.


주 1) Ehlers, A. & Clark, D. M., (2000). A Cognitive Model of PTSD. Behaviour, Research and Therapy, 38, 319-345.

한 중년사내의 몸에 대한 애처로운 인덱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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