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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로 Aug 04. 2020

커피를 사랑하는 완벽한 방법

커피를 내릴 때, 나를 느끼는 순간

영원한 위시리스트인 코만단테로 그렸으나, 실제 우리집 핸드밀은 11,000원짜리. 상완근과 악력 운동 효과가 엄청나다. © 2020 Roh

합리성과 실용주의를 표방하던 내 삶에 균열이 생겼다.

용도가 모호한 금속 스탠드와, 깔때기로도 쓸 수 없는 원추형 드리퍼, 대관령 고갯길처럼 주둥이가 휘어진 주전자를 사들이더니만, 한잔을 받기 위해 드리퍼에서 떨어지는 방울방울을 하릴없이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핸드드립 커피는 그 틈을 비집고 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커피를 만드는 요령은 다양하다

그중에서 핸드드립(푸어 오버)은 무척 번거로운 방법 중 하나이다.

도구도 많이 필요할뿐더러, 매번 종이 필터를 써야 하고, 그라인더를 돌리다 보면 팔이 뻐근해질 정도다.

단 한잔을 위해 쌓이는 설거지 감은 말할 필요도 없다.

명망 높은 '게으름학' 권위자인 내가 어쩌다 이런 불편한 짓을 하고 있을까?

사랑하면 시간도 노력도 아깝지 않은 법.

도통 아까운 줄 모르겠으니, 나는 정말 이 커피를 좋아하나 보다.


핸드드립은 말 그대로 커피 원두를 따라 물을 내리는 방법이다.

원두를 갈아낸 뒤, 필터를 품은 드리퍼에 살포시 올린다.

드리퍼에 끓는 물을 올리면, 서버로 검은 액체, 커피가 내려온다.

상승과 하강의 변곡점, 그곳에서 커피가 시작된다.

커피를 내리는 행위는 고대로부터 인류가 반복해온 제의(祭衣)를 닮았다.

손질한 제물을 올리고, 축복이 내려오기를 기원한다.

유전자에 각인된 태곳적 본능 때문일까?

나는 이 작은 의례 행위를 기꺼이, 경건하게 수행한다.

 

인스턴트커피도 종종 즐길 만 하지만, 풍부한 맛의 커피는 본디 인스턴트하게 허락되지 않는다.

드리퍼와 서버의 조합은 흡사 모래시계를 닮았다.

모래가 서서히 흘러내리 듯, 방울방울 떨어지며 조금씩 커피가 모여든다.

마음이 급해도 어쩔 수 없다.

드립방식에서는 에스프레소- 약 9 기압의 압력으로 추출- 와 달리 어떠한 외압도 배제한다.

오로지 자연의 힘, 중력을 따를 뿐이다.

흐르는 물을 따라 자연스러운 맛과 향이 추출된다.

보다 큰 행복을 위해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Abstract Image of Pour Over Coffee

핸드드립 커피는 원과 삼각형, 사각형의 원초적인 형상을 품고 있다.

그라인더의 핸들을 둥글게 돌리며 원두를 갈고,

삼각형의 드리퍼에 물을 내리면,

사각형의 서버에 커피가 담긴다.

대관령 고갯길처럼 휘어진 주전자 주둥이에서, 뜨거운 물줄기가 부드러운 하강곡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갓 볶은 원두가루에 물이 떨어질 때, 돔 모양으로 가루가 부풀어 오른다.

우아한 곡선의 미학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테이블 앞에서 누군가 커피를 내리는 모습은 밋밋해 보일지 모른다.

실제 커피가 만들어지는 풍경은 역동적인 동시에 감각적이다.


온갖 수고를 거쳐 커피를 내린 후, 마시는 첫 모금에 난 늘 소리를 낸다. “히야~”.

술 먹고 내는 소리 “키야~” 와는 엄연히 다르다.

일부러 낸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옛날 모 커피 광고에서 안성기 아저씨는 미소 지으며 우아하게 마셨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아저씨들은 괜히 소리를 내는 경향이 있지만, 그 때문은 아니다.

확실히 소리를 내야 더 맛있다.

솔직히 힘들어서 내는 소리도 좀 섞여 있음을 고백한다.


커피는 인생을 닮았다.

본래 그 맛은 씁쓸하다.

그 뒤에는 단맛, 탄맛, 신맛, 고소한 맛 등 다양한 맛으로 여운이 남는다.

커피 맛은 원두, 발효, 로스팅, 그라인딩, 물의 온도와 접촉 시간 등 수많은 요소에 따라 달라진다.

별다방의 커피 맛은 늘 한결같지만, 핸드드립에서 같은 맛의 커피는  없다.

내릴 때마다 맛이 제각각이다.

원하는 맛을 내려면 많은 변수들을 정밀하게 통제해야 한다.

골치 아플 수도 있지만, 그래서 쉬이 질리지 않고, 새롭고, 흥미롭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커피는 무엇보다 향기의 음료이다.

나는 커피의 맛보다 향을 더 좋아한다.

원두를 계량 후 분쇄하고, 물을 끓인 뒤 드리퍼 올려 서버에 내리기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

커피 향기가 집안 가득 퍼지기에 충분하다.

그윽한 향기가 코끝에 살랑이다 전신을 감쌀 때면,

그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조용한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커피 향 속에서 소소한 미움, 원망, 분노의 감정은 겸연쩍어진다.

집안 분위기가 냉랭할 때면, 난 커피를 내린다.

다시 찾아온 소중한 평화!

연구실에 찾아오는 손님에게도 직접 커피를 갈아서 내려준다.

사실 별것 아닌데 다들 꽤나 좋아하는 눈치다.

작은 수고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다.


커피가 특별한 위안이 되는 순간이 있다.

나는 카투사로 의무부대에서 미군들과 복무했었다.

당시 미군 부대장은 군인정신(을 가장한 진급 욕심)으로 충만하여 1달에 한 번씩 야외로 훈련을 나갔다.

의무부대가 아니라 야전부대에 가까웠다.

대여섯 정도가 함께 큰 막사형 텐트에서 지냈는데, 트레일러에 싣고 온 발전기로 저녁에도 텐트 안에 전등을 켤 수 있었다.

무거운 발전기를 훈련장까지 가져오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커피메이커를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커피 사랑은 남달랐다.

텐트에서 추위에 떨며 자다가 보글보글 소리와 기분 좋은 냄새에 눈을 뜰 때가 있다.

커피메이커에서 모닝커피가 완성된 시간이자 기상 시간이다.

며칠씩 이어지는 야영 생활로 춥고 서글프고 짜증 나던 그때,

물 끓는 소리와 커피 향에서 느낀 그 평온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메리칸 솔저가 건네준 아메리카노는 쓰지 않았다.


독일의 역사학자 하인리히 야콥(Heinrich E Jacob)은 그의 저서 ‘커피의 역사’에서 커피의 각성 효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커피는 낭만과 신성이 춤추던 ‘와인의 시대’를 끝내고 합리와 과학의 근대를 이끌었다."

나는 진료실에서 종종 환자와 커피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어떤 이는 커피에서 위안을 얻기도 하지만, 일부는 커피 때문에 불안이 심해지거나, 잠 못 이루기도 한다.

2013년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에서는 개정판 이전에는 없었던 카페인 금단(caffeine withdrawal)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커피나 에너지 드링크처럼 고 카페인 음료가 의존 성향이 높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카페인이 함유된 물질 남용을 다른 중독물질처럼 질병으로 진단하지는 않는다.

지나치게 와인을 섭취하면 '알코올 사용장애'가 될 수 있지만, 커피를 과도하게 음용한다고 커피 사용장애가 되진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늘 지나친 탐닉에는 폐해가 있기 마련이니 조심해야 한다.


커피가 뇌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있다.

최근 몇몇 연구에서는 치매나, 파킨슨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에 예방효과가 있었다.주 1,2) 

하지만, 커피 내 성분이 불분명하고, 아직 근거가 충분치 않기에 뇌에 좋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핸드드립으로 추출하는 커피는 상대적인 이점이 있다.

20년간 50만 명에 대한 유럽의 역학조사에 따르면, 필터를 이용한 커피를 먹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심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을 15% 정도 낮았다. 필터를 사용하면 LDL 콜레스테롤을 높이는  '카페스톨' 성분이 95% 이상 걸러지기 때문이다. 60세 이상에서는 필터를 사용하지 않는 커피를 마시는 사람에서 사망률이 더 높았다.주 3) 필터를 사용한 커피가 다른 커피보다 혈행(vascularity)에 더 좋다는 근거는 상당히 축적되어 있다. 주 4)

반면, 핸드드립 커피는 에스프레소보다 원두 가루와 물이 닿는 시간과 면적이 넓다.

당연히 카페인 함량은 훨씬 더 높아진다. 무엇이든 양면성이 있는 법이다.  


맛있는 드립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두 분쇄가 특히 중요하다.

편리성 측면에서 전동 기기의 유혹이 있지만,  난 수동 그라인더를 쓰고 있다.

핸들을 돌릴 때 전해지는 묵직한 진동과 저항감이 좋다.

이것은 내게 조금 특별하다.

정신과 의사인 나는 하루 종일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 공기를 매개로 음성과 눈빛을 주고받는다.

간혹 어깨를 토닥이거나 악수를 하기도 했지만, 코로나 19 사태 이후 이마저 뜸해졌다.

직업적 특성상, 중립성을 훼손할 수 있기에 환자와의 불필요한 접촉은 최소화해야 한다.

하루 종일 많은 것을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일 때가 있다.

몸을 별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는 모든 종류의 의사들(뿐 아니라 다른 직업을 포함해도) 중에 움직임이 가장 적은 직종이다.

노동의 고귀함을 알고, 땀 흘리는 삶의 가치를 존중한다. 진료 중에 가장 자주 권하는 말 중 하나가 움직이라는 주문이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일상에서 열심히 일한 뒤의 뿌듯함을 몸으로 온전히 느끼기는 쉽지 않다.

몸을 쓰는 기회는 소중하다. 손을 사용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래야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수동 그라인더를 사용하는 이유이다.(설거지도 열심히 한다. 절대로 자발적이다.)

한 손으로 그라인더 몸통을 꼭 쥐고, 다른 손으로 핸들을 열심히 돌린다.

짧은 시간이지만, 원두를 갈아내며 세상과 치열하게 교감한다.

가상 세계를 향해 스마트폰을 터치하고, 마우스를 클릭하는 공허한 몸짓이 아니다.

원두와 맹렬히 부딪치며 한잔의 커피를 꿈꾼다.

사랑한다면 이렇게 해야 한다.

그 어떤 의사보다 환자를 사랑하지만, 그 대상을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은 이 직업의 근원적 비애이다.

한 사내가 끙끙대며 그라인더의 핸들을 돌리는 행동은, 생각보다 진지하고 애잔한 몸짓일 수 있다.


직접 원두를 볶는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커피 고수들의 블로그에서 원두 로스팅 기계를 기웃거리고 있으니, 방심해서는 안된다.

좋아하는 것을 쫓다 보면, 나는 더 나다워진다.

마침 그 일이 큰돈 들지 않고, 건강에 해롭지 않고,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주위 사람들도 즐겁게 만든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커피를 내리고, 마시고, 나누는 일상에 행복이 깃들어 있다.

행복이란, 한잔의 커피처럼 구체적이며 감각적인 경험이다.

좋아하는 대상을 깊이 음미하다 보면, 감각이 단련되고, 생각이 깨어나고, 취향이 넓어진다.

이것만으로도 살아볼 만하다.

적어도 커피를 사랑하는 나와 당신이라면 말이다.


주 1) Yan R, Zhang J, Park HJ, et al. Synergistic neuroprotection by coffee components eicosanoyl-5-hydroxytryptamide and caffeine in models of Parkinson's disease and DLB. Proc Natl Acad Sci U S A. 2018;115(51):E12053-E12062. doi:10.1073/pnas.1813365115

주 2) Kim JW, Byun MS, Yi D, et al. Coffee intake and decreased amyloid pathology in human brain. Transl Psychiatry. 2019;9(1):270. Published 2019 Oct 22. doi:10.1038/s41398-019-0604-5

주 3) Tverdal A, Selmer R, Cohen JM, Thelle DS. Coffee consumption and mortality from cardiovascular diseases and total mortality: Does the brewing method matter? [published online ahead of print, 2020 Apr 22]. Eur J Prev Cardiol.

주 4) Rebello SA, van Dam RM. Coffee consumption and cardiovascular health: getting to the heart of the matter. Curr Cardiol Rep. 2013;15(1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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