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교수가 본 의대교수의 아들자랑
“저 이번에 All A 받았어요!”
진료가 끝나고 나가다가 돌아서서 한마디를 한다.
“이번 학기에 과에서 1등 했어요.”
또 다른 환자 분도 진료 중에 수줍은 듯 말했다.
내게 치료받던 환자 분들이 각자의 삶에서 좋은 성취를 거두는 일만큼 뿌듯한 것은 없다.
게다가 All A 학점에 1등이라니!
호전의 증거로 내게 이렇게 일종의 승전보를 전하는 일이 종종 있다.
핸디캡 속에서 그들의 노력이 어떠했을지를 떠올리면, 숙연해진 마음에 잠시 진료를 멈출 때도 있었다.
늘 함께 축하하고 기뻐하는 마음이지만, 과한 표현을 자제하려 노력한다.
(마음속으론 벌떡 일어나 손이 얼얼하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리고 종종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곤 한다.
“All A를 맞지 않았어도 변함없이 소중한 분일 겁니다.”
“1등을 못 하셨어도 여전히 귀한 분입니다. 알고 계시죠?”
반가운 표정과 격한 칭찬만으로 진료가 끝난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좋아하는구나!’라고 받아들일까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늘 경쟁에서 이기고, 남다른 성취를 해야만 인정받아 왔다.
높은 기대치와 완벽주의로 자신을 옥죄어 왔던 부모 때문에 항상 힘들어했다.
잘해야만 관심을 받는 조건부 사랑의 규칙을, 진료실에서도 확인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내 또래의 친구 모임이 몇 개 있다.
격이 없이 어울리는 자리라 편하고 즐겁긴 하다.
하지만 이 또래 치들끼리 모이면, 생각보다 대화의 주제가 협소하다.
특히, 교수나, 의사, 대기업 간부인 친구들과의 어떤 모임에서는
중년 사내들이 모여 ‘내가 얼마나 잘 나가는가?’를 서로 겨룬다.
얼마나 빨리 정교수가 되었는지, 주식으로 얼마를 벌었는지, 병원 수익으로 세금을 얼마를 냈는지 이런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한창 사회적인 성취를 거두고 있는 시기에, 서로의 발전을 격려하고, 스스로 노력을 다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성취지향주의적 대화를 지켜보다 보면,
아직도 학교에서 등수로 줄을 세우던 중고교 시절에서 한 발짝도 더 못 나간 것 같아 서글프다.
결국은 나의 자격지심 때문이겠지만,
“네가 잘 나가는 사람이라 존경스럽다.”는 식의 노골적인 대화가 나는 좀 불편하다.
그 속에 평범한 회사원이나, 자영업 하는 사장 정도로는 대화에 끼어들 틈이 없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승진을 빨리 못해도,
우리 모두에겐 존경받을만한 수많은 이유들을 각자 품고 있을 것이다.
남자들의 성공을 향한 맹목성이, 한국에 뿌리내린 가장을 규정하는 서글픈 속성일지도.
자칫 마주할지 모르는 midlife crisis를 피하려면, 관심과 기준이 조금 더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물론 그들 앞에 이런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다. 가끔씩 화제를 전환하려는 시도를 할 뿐.
그들이 잘 나가든, 못 나가든 내겐 똑같이 추억을 나눈 친구일 뿐이니까.
며칠 전 한 의대 교수가 아들 자랑을 하다가 논란이 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자신의 아들이 젊은 나이에 전임교수가 되었고, 교과서에 저자로 등재될 정도로 이름이 났다며 SNS에 자랑하는 글을 올렸다고 한다.
특히 자신의 도움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밝히는 등, 아빠 찬스에 관련한 특혜가 의심이 되어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모양이다.
교수집단의 허위의식과 편협한 엘리트주의가 드러난 것 같아 낯 뜨겁게 느껴진다.
만화를 그리는 의사로 잘 알려져서 개인적으로 관심 있게 보던 교수님이었는데 좀 안타깝다.
“날 닮아 그림도 잘 그린다. 내가 만화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라는 자랑이었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부끄러워하며 All A 학점과 1등 소식을 전하던 이들을 자랑하고 싶다.
나의 진료실에는 멋지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다.
스스럼없이 도움을 요청할 만큼 솔직하고, 삶을 그대로 드러낼 만큼 용기있는 사람들이다.
씩씩하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가는 그들이 내 ‘잘 나가는 친구들’보다 더 존경스럽다.
분명한 건, 그들의 성취는 내 도움과는 거의 무관하며, 스스로 해냈다는 사실이다.
또한, 어떤 학점과 등수를 받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란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