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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로 May 12. 2020

수선화의 나르시시즘

Narcissism of Narcissus (feat. 코로나의 망령)

The change of the narcissism © 2020 Roh.

부끄럽다. 이제야 알게 되다니.

정신의학을 공부한 지가 언제인데, 아는 척하며 '나르시시즘'이란 용어를 그간 잘도 써왔다.

그 어원이  'Narcissus' 즉, 수선화라는 사실은 심리학을 접한 사람은 모를 수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선화가 어떤 꽃인지, 모양도, 색깔도 전혀 몰랐다.

상식 부족에 직무 유기이다. 창피할 따름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꽃놀이에 나섰다.

노랗고 흰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밭에 도달했다.

'색도 예쁘지만 모양도 독특한 꽃이구나'라며 푯말을 보니 그 유명한 수선화였다.

"우와~"하며 신기해하는 내 모습을 들킬까 두려웠다.

옆에 놀러 온 초등학생 무리가  "2학년 탐구생활에 다 나온 건데?"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저들보다는 더 격한 반응을 보인 이유를 대보자면,

수선화를 본 순간, 왜 Narcissus 란 꽃말이 붙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본 수선화는 꽃 머리가 특이하게도 앞쪽으로 굽어 있다.

물가에 있었다면 영락없이 자기 얼굴을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또한 가운데 꽃술 주위의 꽃잎이 앞으로 돌출되어 있다.

어찌 보면 얼굴을 내민 형상이랄까?

자신의 얼굴을 보고 연못에 빠져드는 그리스 신화 속 미소년 나르시소스가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이를 잡아낸 옛 성현들의 눈썰미에 탄복할만하다.


멋진 꽃밭에서는 당연하게도 한창 (나도 동참한) 셀피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은 왠지 어색하다.
셀카를 찍고 SNS에 공유하는 행위의 본령에는 나르시시즘이 있기 때문이다.

원조 나르시소스를 앞에 두고 우쭐대는 셀피족들이라?

마치 스티븐 잡스 앞에서 아이폰을 자랑하는 것과 같은 풍경이다.

'나 때는 말이야, 그 손바닥만한 화면 대신, 수정 같은 연못 위로 전신 풀샷을 잡았었지'라는 외침이 들릴 것만 같다.


SNS, 그리고 selfie와 나르시시즘에 대한 논의는 심리학에선 더 이상 새롭지 않다.

한 논문에서는  “페이스북 증후군은 곧 도래할 나르시시즘의 판데믹이다.(Facebook syndrome:An Upcoming Pandemic of Narcissism)” 란 신랄한 제목을 달기도 했다._주 1

좋아요와 댓글의 무한 숭배를 만끽하는 sns 세상이 정말 '나르시시스트의 천국 (narcissist heaven)_주2'일까?

최근 독일에서 886명의 학생들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좀 달랐다._주3

나르시시즘이 강한 학생은 SNS 방식보다 대면 소통 (face to face communication)을 더 선호했다.

온라인에서보다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 관심을 받고 싶고,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나르시시즘의 두 가지 핵심 욕구가 더 잘 충족되었던 것이다.

결국 현실에서의 결핍이 온라인 상의 보상 욕구로 반영된 셈이다.


나르시시즘의 핵심은 자존감 결여와 과잉된 자기감의 보상이다.

온라인상에서 과장된 자기(Exaggerated self)에 대한 열광이 커질수록, 현실에서의 자기(Real self)와의 괴리감은 커지고, 자존감은 더 떨어진다.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을 때, 자기의심에서 벗어나 진짜 자존감이 회복되고, 온라인에서 '피상적 대인관계를 수집하려는 욕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꽃밭 속 수선화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접 만나러 와 주고,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와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대면 소통 (face to face communication)으로 관심 욕구와 자기 현시 욕구 모두 잘 충족되고 있다.

인증샷을 통한 온라인 상의 인기는 덤이다.


수선화 입장에선 억울한 측면도 있다.

수선화의 첫 인상은 잘난 척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물론 예쁘고 화려 하지만, 과하다기보다는 단아하고 입체적인 미모를 지녔다.

입체적인 이유는 그림처럼 6장의 꽃잎들과 수직으로 배열된 원통형의 꽃잎 때문이다.

이런 독특한 구조를 지닌 다른 꽃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초등생들에게 확인해봐야 한다

줄기와 잎은 가늘지만 힘 있고 곧게 뻗어 고운 선을 그린다. 과시적이기보다는 간결하고 우아하다.


수선화는 생각보다 겸손하다.

굽은 꽃 머리는 오히려 겸양의 표현일 수 있다.

익은 벼보다 훨씬 일찍부터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까.

이 우아하고, 개성 넘치며, 겸손하기까지 한 수선화에게,

나르시시즘의 꼬리표는 억울할 법도 하다.

측은한 마음으로 다시 보니, 수선화의 돌출된 꽃잎이 뾰로통해진 입술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21세기의 방식으로,

수선화의 나르시시즘 해소를 위해 작은 도움을 주기로 했다.


PS. 근데 여기서 깜놀. 궁금해서 좀 찾아봤더니, 돌출한 꽃잎의 이름이 corona이다._주4 벗어날 수 없는 코로나의 망령.


주1: Mayank Vats., Facebook Syndrome: An Upcoming Pandemic of Narcissism, SF J Neurosci 2:3. 2018.

주2: https://coach.nine.com.au/health-issues/facebook-psychology-studies/51e8433c-51e3-4bfd-83e7-99b55df14038#12

주3: Blumer T, Leonard H, Lara Ruiz JM, et al.  Narcissism and related need satisfaction among German Social network users. JBMP 8: 28-36. 2017.

주4: Waters et al., The corona of the daffodil Narcissus bulbocodium shares stamen like identity and is distinct from the orthodox floral whorls. The plant journal.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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