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시대, 다시 만나야 하는 이유
며칠 전, 남산 둘레길 '종주'(나 같은 등린이에겐 그렇다)의 대장정에 올랐다. 언택트 생활에서 벗어난 시민들은 해방감으로 달뜬 표정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웃고 떠들며 모처럼의 컨택트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나 역시 Relive앱을 켜고, 둘레길의 온전한 폐곡선을 완성하리라 다짐하며, 탈 마스크 상태로 향긋한 초여름의 녹음을 즐겼다.
둘레길을 반원 정도 그렸을 무렵, 한 여인을 보고는 한동안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크롭티에 레깅스 차림으로 건강미를 뽐내는 모습이 아니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암환자처럼 깡마른 몸이, 언뜻 남자와 구별이 잘 안 될 정도였다. 수건 하나만 목에 두르고 목발을 짚으며 걷고 있었는데, 한발 한발 내딛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놀랍게도 두발 모두 맨발이었다. 창백한 피부 때문에 까만 발바닥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 길 위를 굼뜨게 나아가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이 무척 힘겨워 보였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치기가 난처했다. 걸음을 늦추고 몇 걸음 뒤에서 잠시 지켜보았다.
그녀는 마주치는 몇몇 사람들과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 순간 찡그린 표정은 사라진 채, 미소 띤 얼굴로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 자주 만나는 사이인 듯싶었다. 나는 이 일상적이지 않은 풍경에 당황했다. 낯설어하지 않는 상대방도 그렇고, 힘겹게 걷다가 웃으며 반색하는 모습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자세한 사연이야 어찌 알 수 있으련만, 적어도 그녀의 맨발 걷기는 자발적인 동기에 따른 행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그녀를 곁을 지나쳐갔다. 나의 튼튼한 두 다리에 감사한 마음도 잠시, 뒤이어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길게 이어졌다.
수행 중인 구도자였을지도 모른다. 맨발 걷기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일각의 이야기도 떠올랐지만, 짐작일 뿐이었다. 분명한 것은, 여인은 그 길 위에 있던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세상을 체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지와의 컨택트였다. 능동적으로 삶의 물성을 느끼고 있었다. 발 아래로 닿는 지면의 온도와 습기, 볼록한 돌뿌리, 까슬한 잎사귀, 그 밖의 알 수 없는 존재들을 느끼는 이는 오직 그녀뿐이었다. 발바닥이 까매질수록, 삶의 의지는 뚜렷해졌을 것이다. 비록 가녀린 몸으로 목발에 의지해 있지만, 거대한 대지와 만유인력으로 끌어당기는 작용 반작용의 접점에서, 맨발로 당당히 버티는 여장부 같았다. 판데믹 시절, 사람들은 서로에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왔다. 이제 다시 가까워져야 한다. 직접적인 관계로 복구되어야 한다. 손으로 닿고, 몸을 만지고, 오감으로 느껴야 뇌가 깨어나고 건강해진다. 우리는 어릴 적 종일 기어 다니며 세상을 탐험하다가도, 때가 되면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와 부드러운 촉감, 따뜻한 온기, 익숙한 체취를 느끼며 회복하고 재충전할 수 있었다. 이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면, 평생 불안을 내재한 채로 성장한다. 반려동물과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 개와 화상으로 하루 종일 만나봐야 소용없다. 60Hz의 주사율로 재현한 스크린과의 교신은 공허할 뿐이다. 한번 껴안고 쓰다듬어주는 것보다 충만한 애정표현은 없으니까.
며칠 전, 악수를 하면서 한참 동안 내 손을 잡던 환자가 있었다. 정신과 진료실에서 환자와의 신체 접촉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순간,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평범한 온기를 갈급해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환한 미소는 처음 보았다.
맨발의 여인은 그날 목적지까지 잘 내려갔을까? 하루빨리 목발을 떼고 힘차게 남산 둘레길을 활보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