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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로 Oct 05. 2021

횡단보도

노년의 외로움을 건너 세월의 결을 따라 사는 법

파리에서 봤던 노부부의 모습. 할머니 발에 붕대가 묶여 있던 기억이 난다. 유럽엔 유독 다정해보이는 노부부가 많다.

외래 명단에 권할아버지의 이름만 보였다. 불길했다. 나란히 보였던 김할머니의 이름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어~ 느낌이 안 좋은데?’라고 중얼거렸다. 가끔 나의 직감이 무섭게 정확할 때가 있다. 이 날이 그랬다. 홀로 진료실에 들어선 권할아버지는 읊조리듯 말했다. “집사람 갔어요.” 짧은 말을 앞에 두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권할아버지는 93세, 아니 올해로 94세가 되었다. 외모는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이고, 지력(智力)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또렷하신 분이다. 권할아버지는 4년 전쯤 잠을 못 잔다며 내원한 김할머니의 보호자로 처음 나와 만났다. 진료 때마다 같이 와서는 아내인 김할머니의 여러 증상과, 약의 부작용에 대해 이것저것 꼼꼼하게 물었다. 놀랍게도 권할아버지는 아내가 복용 중인 모든 약의 이름과 약전의 내용을 꿰고 있었다. 잘 빗어 넘긴 머리처럼, 단정하지만 꼬장꼬장한 인상의, 의사로서는 솔직하게 좀 꺼려지는 보호자였다. 나는 예리한 정신과 의사는 못되지만, 까탈스러워 보이는 태도가 아내를 살피는 마음에서 비롯됨을 눈치 못 챌 정도는 아니다. "이 병원에 오는 남편들 중에 나보다 더 늙은 이는 없을 거이. 자넨 고마운 줄 알아야 돼." “또 쓸데없는 말을 하시네. 그만 하시구랴.” 티격태격하는 두 노부부의 모습이 귀엽고 정겨워 보였다.

 

김할머니는 무릎도 썩 좋지 않아 거동이 불편했다. 하루는 병원 앞 횡단보도에서 두 분을 만난 적이 있었다. 권할아버지가 김할머니를 부축하며 느릿느릿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90세 남편이 84세된 아내의 등 굽은 어깨를 감싸고, 아내는 남편의 주름 가득한 손을 꼭 잡은 채, 한 발씩 내딛고 있었다. 아직도 이보다 더 다정한 부부의 뒷모습을 떠올리기 힘들다. 차가 함부로 지나지 않도록 나도 한걸음 옆에서 슬쩍 보조를 맞추며 건너갔다. 3년 전, 김할머니가 고관절 골절로 쓰러진 이후에는 이런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었다.

 

90세면 누굴 돌볼 나이가 아니다. 누워서 지내는 김할머니의 간병을 시작한 권할아버지는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여편네 옆에서 내가 잘 버텨야 해요." 하지만 아내가 점차 기억을 잃어가면서, 권할아버지는 점점 고난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할머니는 식사를 했음에도 밥을 달라고 하거나, 침대에서 자꾸 내려오려 해서 그를 힘들게 했다. 아내 대신 약을 타러 온 권할아버지는, 아내 곁을 끝까지 꼭 지켜줘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내게는 지쳐가는 마음을 다잡는 다짐으로 들렸다.

 

안타깝게도 김할머니의 건강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폐렴으로 응급실로 입원하기도 하고, 길어지는 와상 상태로 인해 치매 증상은 더 나빠졌다. 급기야 대소변도 가리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조심스럽게 간병인 두기를 권유했으나, 권할아버지는 단칼에 거절했다. 대소변 처리에 나름 요령이 있기 때문에, 자신 외에는 누구도 제대로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평소 아내가 부끄러움이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손길은 거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권할아버지의 꼼꼼하고 빈틈없는 성격을 떠올리면, 충분히 짐작할만했다. 그의 몸은 곁에 둔 지팡이처럼 야위었지만, 눈빛은 전장에 나선 장수처럼 의기양양했다.

 

간병을 계속하던 권할아버지는 어느 날 잠들기가 어렵다며 내게 도움을 청했다. 면담을 시작하면서 김할머니와 25년 전 재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각자 배우자를 사별하고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60대에 시작한 두 번째 결혼이었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결혼생활을 시작했고, 서로에만 의지하며 지금까지 지내왔다고 했다. 고령의 노인 진료에 자녀 분들이 관여하지 않았던 이유와, 간병에 임하는 그의 간절한 노력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두 번째 이별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한 남자의 안간힘이었던 셈이다. 첫 번째 결혼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권할아버지에게 유일한 관심은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아내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 뿐이었다. 까탈스럽게 약 부작용을 따져 묻던 보호자는, 애틋한 순애보를 지닌 내담자가 되었다.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일이 순탄할 리 없었다. 기억력 문제와는 별개로, 김할머니의 몸 상태는 좋아졌다가 다시 나빠지기를 반복하였다. “좀 식사량이 늘었어. 살이 붙었어. 선생 덕 좀 봤수.” 아내가 좋아졌다는 소식을 전할 때면, 권할아버지의 눈빛은 어린 소년처럼 반짝였다. 때로는 별 말이 없이 약만 달라고 했다. 영락없이 아내의 상태가 나빠졌을 때였다. 아무리 건강이 좋은 편이라 해도 노구를 이끌고 간병을 지속하기는 힘들었다. 권할아버지는 비로소 간병인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대소변 처리는 변함없이 자신의 몫이었다.  

 

시간은 기약 없이 흘러갔다. 권할아버지는 어느덧 망백(望百)의 나이를 넘었다. 얼마나 남았을지 장담할 수 없는 자신의 시간을 아내의 간병을 위해 쏟아부었다. 이제는 자신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는 아내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소모하고 있었다.  구순이 넘은 나이임에도 그 누구보다 정신이 또렷한 권할아버지의 이 맹목적인 행위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순수한 의지에 압도되었다. 그럼에도 그를 말리고 싶었다. 김할머니를 온전히 전문 요양사에게 맡기고, 남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누리도록 권하고 싶었다. 하지만 겁이 났다. 그에겐 이미 간병 자체가 바꿀 수 없는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섣불리 그만두기를 권유했다가는 간신히 지탱해 온 몸과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아내와의 이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마지막 날은 머뭇거림 없이 찾아왔다.

 

아내의 장례식 이틀 뒤에 내원한 권할아버지는 의외로 담담했다. “난 최선을 다했다우. 후회는 없어."  나는 세상 그 어떤 남편도 권할아버지만큼 할 수는 없었을 거라고 위로했다. 그는 초점 없는 얼굴로 말했다.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해.”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솔직한 소회였다. 나 역시 내 환자이기도 했던 김할머니를 애도하는 마음을 전했다.  망자를 마음에서 잘 떠나보내야 하고,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도 말하면서도, 모를 리 없는 말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무력감을 느꼈다. 권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없이 진료실을 나섰다.

 

권할아버지는 깊이 절망했다. 그는 종종 진료실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몸은 편해졌지만, 정신은 흐려졌다. 인지평가와 뇌기능 검사에서도 현저한 기억력 감퇴 소견을 보였다. 연세를 생각하면 넋 놓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치매약을 처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화에 따른 경과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권할아버지에겐 더 이상 기억할 대상도, 이유도, 의미도 없는 것일까? 어찌 보면 흐려지는 기억이 위안이 될 수도 있다. 권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슬픈 남편이었다. 사랑했던 아내를 보내는 일을 두 번 겪었다. 오래 산 축복에 대한 대가라고 하기엔 너무 큰 아픔이다. 홀로 언제까지 지내야 할지 모르는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남은 일이란 마지막을 향해 스러져 가는 여정일 뿐이라면, 기억하지 못하는 쪽이 축복일 수도 있다. 다만, 그토록 정신이 또렷했던 권할아버지가 지각이 흐릿해진 채로 살아간다는 사실에 서글퍼졌다.

 

권할아버지 주위엔 이제 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친구들도 다 세상을 떠나고, 남은 친척들도 거의 없다고 했다. 노년의 외로움은 당연한 것이라 말하기엔 너무 가혹하다. 무심해 보이는 자녀들이 야속했지만, 실상 밀어내는 쪽은 권할아버지였다. 나는 가능한 한 병원이라도 자주 오시도록 했다. 이 과정을 딱히 진료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냥 얼굴 마주하고 소소한 일상을 묻는 정도였다. 다만 자신을 떠올리는 누군가가 있음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치열했던 분투의 과정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권할아버지는 귀찮은 내색없이 정기적으로 진료실에 들렀다. 시간은 그의 슬픔을 조금씩 덜어갔다. 그만큼의 시간이 그에게 허락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권할아버지는 점차 기억력을 회복했고, 이전만큼 정신도 명료해졌다. 나는 과감히 치매약 처방도 중단했다. 권할아버지는 나보다 거의 반 백년을 더 살았다. 치료자의 권위란 저 정도 연배의 사람에게는 무력하다. “내 노선생한테 늘 신세를 졌어.” 딱히 해드린 것도 없는데 자꾸 건내시는 말씀이 부담스럽다. 그와 나는 그저 오랜 친구 같다. 염색을 게을리한 내 머리도 얼추 희끗희끗하다. 우리는 말이 없어도 눈빛으로 통한다. 그는 길고 긴 세월을 살아왔고, 나는 꽤 많은 사람들을 면담해 왔다. 우리 정도 사이라면 그럴만하다. 권할아버지는 외래에 올 때면 말씀하신다. "내가 또 살아서 왔수." 나는 이런 류의 농담을 좋아한다. 나는 90 중반의 나이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아내를 두 번 떠나보낸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권할아버지가 나이듦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낀다. 또한 그가 진심을 다해 사랑했기에 더디 늙었음을 안다.

 

오늘 외래 명단에 권할아버지의 이름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절로 미소가 나온다.  홀로 횡단보도를 건너왔을 그를 큰 목소리로 맞이한다. "잘 지내셨어요?"


<여러 환자와의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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