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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로 Aug 15. 2023

진료실의 바퀴벌레

 

"방해할 의도는 없었어요. 잠시 그냥 길을 잃었을 뿐입니다!" © 2023 Roh.

최근 장례를 치른 환자와 면담 중이었다. 진료실 바닥에 검은 점 같은 것이 진즉부터 거슬렸었다. 불규칙한 움직임으로 미루어보아, 생명체임이 분명했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살아있는 것에 신경 쓰고 있는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살아온 날이 헛되지 않은지라,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벽 쪽 멀리에 있는 바퀴벌레가 당장 방해가 되진 않았지만, 면담에 온전히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다소 급하게 상담을 마무리하고 가까이 다가가니, 움직임을 느낀 녀석은 얼른 문틈으로 숨어들었다. 대기하던 환자 분들이 놀랄까봐 걱정도 되고, 병원의 위생 운운 하며 공연히 입방아에 오를 것도 신경이 쓰였다. 벌레가 숨어 들어간 문틈을 열었더니, 나의 기세에 얼어붙었는지 가만히 있었다. 외래 간호사들이 무슨 일이냐며 다가왔다가 “꺄악~” 비명을 지르고 뒷걸음질을 쳤다. 대기실의 외래 환자들도 모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바퀴는 모기나 파리처럼 사람을 물거나 달라붙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바퀴에게 느끼는 혐오감의 근원은 크기에 비례한 존재감 때문일 것이다. 간호사의 비명소리와 환자의 웅성거림의 음량은 바퀴벌레의 크기에 비례하고 있었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 문득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영웅심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사실 바퀴를 혐오의 대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백악기 시대부터 생존해 온 가장 오래된 생명체 중 하나이고, 인류가 멸망한다 해도 끝까지 남을 것이다. 또한 바퀴벌레는 초당 25회의 방향전환을 하고, 시속 150km로 이동할 정도로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지금은 환자와 직원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저열하고 흉측한 생명체에 불과하다.

진료실에 난입하여 소중한 면담의 집중력을 흩트린 저 버릇없는 녀석을 내 손으로 단죄하리라. 낯선 침입자를 엄벌하는 용감한 주치의로서 존경과 귀감의 대상이 되리라. 솔선수범하는 치료자의 모습은 또 얼마나 진실되며 든든한가?


  그래도 가만히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녀석의 크기가… 좀 심하게 컸다. 선뜻 내키지 않는 사이즈였다. 도구가 필요했다. 외래간호사실에 외쳤다. “신문지 없어요?” 요즘 어디에서나 신문지는 레어템이다. 있을 턱이 있나? “종이 같은 것 좀 주세요.”. 간호사도 당황한 모양이다. 내 손에 쥐어진 종이는 심리검사결과지였다. 아무리 사본이 있다 한들, 환자의 구구절절한 마음상태가 깨알같이 담겨있는 심리결과지를, 아무렇지 않게 돌돌 말아서 벌레를 향해 내려치지는 못할 정도의 직업윤리는 아직 내게 남아 있었다. “다른 파지는 없어요?” 허둥지둥 우왕좌왕하는 사이, 내 옆으로 휙~ 날랜 움직임이 느껴졌다. 티슈 한 장으로 바퀴를 집어 올리는 가냘픈 몸이 보였다. 진료를 기다리던 중년의 여자 환자 김 아무개 씨였다. “환자 분이 하실 게 아닌데...” 나는 반쯤은 나무라는 투로, 황급히 그 포획물을 빼앗듯 건네받고 휴지통에 넣었다. 물론 한번 꾹 눌러보는 ‘확인사살’은 잊지 않았다. 소소한 미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사실을 꾸욱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떠들썩하게 나섰다가 쭈뼛거리는 사이, 그곳에서 가장 마른 여인이 사태를 해결했다. 치타보다 빠른 상대를, 소리도 없이, 가장 작은 몸짓으로. 그녀가 일본의 막부시대에 태어났다면, 최고의 자객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란 상상을 했다.  


  다시 진료를 시작했다. 당혹감으로 두근거림이 진정되지 않았던 나와는 달리,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한 얼굴을 보니 머쓱해졌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어보이는 그녀도 두려워하는 대상이 있었다. 요즘 학원도 종종 빠지고, 밤늦게 게임에 빠져 있는 중3 아들이었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도 평온한 녀석의 표정을 보면 소름 끼쳐요!” 마음을 읽힌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https://youtu.be/fbuWKSztG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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