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년사내의 곱슬머리 콤플렉스 극복기
뜻밖의 인연은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한다. 미용실 원장님과의 만남이 그랬다. 짬이 나서 들른 미용실에 담당 실장님이 비번이었다. 간단한 남자커트에 꼭 누구어야만할 이유는 없었다. 난 건조하게 말했다. “아무나 시간 되시는 분이 해주세요.” 그만큼 관심도 기대도 없었다. 그렇다. 나는 곱슬머리다. 방사상으로 뻗은 데다 뻣뻣하기 그지없는 강성 모발. 자신을 원장이라고 소개하며 누군가 다가온다. ‘원장이 나선 걸 보면 난이도를 느낀 모양이군.’ 씁쓸했지만,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던가? 하지만, 이어진 1시간 여 가량을 잊을 수 없다. 미용실 원장님의 놀라운 자존감 수업이었다.
Chapter 1.
“머리카락이 너무 좋은데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미용실에 가면 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머리가 꽤 곱슬이시네요.” 손이 많이 가고 부담이 된다는 푸념과 같다. 미용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드라이로 머리를 펴 주기도 한다. 나는 그가 짓는 뿌듯한 표정의 의미를 안다. ‘내가 이 어려운 걸 해냈어!’ 나는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끼며 총총히 미용실 밖으로 나오곤 했다. 미용실 풍경을 둘러보면, 곧게 잘 뻗은 머리카락의 손님일수록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것만 같다. 미용실은 상처와 질투의 공간이다. 난 의아해하며 물었다. “제가 꽤 곱슬인데요?” 원장님은 “아니에요. 직모는 이제 옛날스타일이죠. 요즘은 오히려 이런 머리가 유행이에요.”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인가? 원장님은 묵직하게 한마디 보탰다. “이런 머리는 돈 버신 거예요.” 미용실은 회복과 연대의 공간이다.
Chapter 2.
하지만 여전히 의구심이 남았다. 몇 마디 칭찬에 상처 입은 내 마음이 단박에 바뀔 리 없었다. 원장님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들어 올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 정도면 숱도 많으시고 딱 좋아요. 같은 곱슬머리 중에도 관리하기 좋은 유형이에요.” 설명은 꽤 구체적이었다. 그렇다 한들 그동안 이 거칠고 구불거리는 머리에 적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매직 스트레이트 파마도 하고, 이곳저곳 미용실을 옮겨 보기도 했다. 어느 날 파마 이후 친구 부부와 같이 같이 찍은 옛 사진을 보며 아내가 말했다. “내가 당신 이런 머리로 사진을 찍도록 허락했던 거야? 믿을 수 없어!” 마법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비라도 부슬부슬 오는 날엔, 머리도 부슬부슬 정체를 드러낸다. 내 곱슬머리는 아무리 해도 안된다는 믿음 같은 게 있었다. 원장님은 확신에 찬 말투로 나를 격려했다. “빗질만 이런 식으로 하시면 돼요. 이대로만 관리하시면 훨씬 어려 보이실 거예요.”
Chapter 3.
“난 왜 하필 곱슬머리일까?” 원망도 했다. 가족들 누구를 봐도 나 같은 악성 곱슬머리는 없었다. 어릴 땐, 당시 유행하던 바가지머리에 선이 고운 외모로 “넌 남자니 여자니?”라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어느샌가 머리카락이 굵고 곱슬거리게 바뀌면서 번민이 깊어졌다. 조금만 소홀히 해서 머리가 길어지면, 방사상으로 뻗은 머리에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되고, 짧은 머리로 유지하려다 보면, 머리카락은 또 왜 이리 빨리 자라는지 세상 귀찮기 이를 데 없다. “난 왜 곱슬머리일까?”에 여전히 답할 수 없다. 좋았던 어린 시절을 꿈결 같이 추억할 뿐이다. 아내의 외조모님께서는 어머님께 늘 말씀하셨다고 한다. 곱슬머리는 고집이 세니 피하라고. 어느 날 둘러보니, 사위도, 손주사위도 모두 곱슬머리였다며 고개를 숙이셨다고 한다. 외조모님은 지금 안 계시니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시겠지만, 난 늘 순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고 있다. 무엇에 홀린 듯 나는 원장님에게 그간의 고뇌의 역사를 말하고 있었다. 원장님은 “네, 고민이 많으셨겠네요.”라며 공감해 주었다. “굳이 펴려고 애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파마를 추천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대로가 딱 좋아요.” 그동안 만났던 미용사들은 한결같이 파마를 권유했었다. 남다른 진정성이 느껴졌다.
Chapter 4.
과거에 집착하면 우울하고, 미래에 몰입하면 불안하다. 원장님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했다. 빗질하는 방향과 요령, 곱슬머리 손질에 적합한 헤어크림 등을 간단히 추천해 줬다. “머리가 짧을 땐 이렇게 하시고, 길어지면 이렇게 하시면 돼요. 이대로만 하셔도 잘 스타일링하실 수 있어요.” 나는 그간 나름 노력을 했으나, 늘 실망했다. 자포자기 상태에 있던 내 헤어스타일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더 이상, ‘왜 나만 곱슬머리일까?’란 무의미한 질문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내 머리는 왜 이 모양이지?’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았다. 구체적인 방법은 항상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다. 기대와 실망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었다. 헤어 에센스를 뿌리고, 마지막 손질이 끝나자, 원장님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만 다듬었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셔서 저도 좀 놀랐어요.” 돌아오는 길 산책 나온 곱슬머리 푸들이 유난히 귀여워 보였다. 집에 와서 거울을 보았다. ‘나름 괜찮은 걸?’
깊은 생각과 탁월한 통찰력을 지닌 동료 의사이자 작가인 윤홍균은, 저서 ‘자존감 수업’에서 자존감 회복을 위해 극복해야 할 핵심 요소 4가지를 언급했다. 1) 지나간 세월이 만든 상처에서 벗어나야 하고, 2) 변하지 못한다는 저항을 이겨내야 하며, 3) 스스로 만들어내는 비난의 목소리를 넘어서야 하고 4) 현재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면서 기대와 실망의 악순환을 극복해야 한다. 미용실의 자존감 수업에는 짧지만 이 모든 과정이 담겨 있었다. 곱슬머리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곱슬머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었다. 이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냉소를 걷어내고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참고문헌) 자존감 수업, 윤홍균 저, 심플라이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