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닥터 로 Feb 07. 2024

요즘 우울하세요? ‘등산’을 처방해 드립니다.

'등산초보' 정신과의사의 자가 처방전

그림 1. 산책 만으로 생각이 정리되고,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다. © 2024 Roh.


취향이란 참 변덕스럽다. 항상 좋아했던 일에 점점 무심해지기도 하고, 절대 관심 없던 것에 느닷없이 몰두하게 되기도 한다. 


어릴 적부터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였다. 내게 “산이냐, 바다냐?”라고 물으면, 당연한 듯 반문했다. “어차피 내려올 걸 왜 굳이 오르는가?” 내 생에 자발적 등산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등산은 어느덧 가장 자주 하는 운동이자, 취미활동이 되었다. 그렇다고 대단한 등산인도 아니고, 아직도 대청봉 한번 올라보질 못했다. 소소한 취미일 뿐이며, 여기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산을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겼다. 주말이면 틈틈이 산에 오른다. 


갈대 같이 변덕스러운 취향 때문이라고 하기엔, 이 극적인 변화를 설명하기 어렵다. 내가 왜 ‘굳이’ 산에 오르고 있는지 이해해 보고자 글의 들머리에 나서본다.


산에 오르내림이 있듯이, 삶에는 변곡점이 있기 마련이다. 대학교 2학년 방학 때였다. 산악반 활동하던 동기 친구가 심심했는지 2~3명 모아서 북한산에 오르자 했다. 나는 서울에 있는 산이니 다 고만고만한 줄 알았다. 테니스화 하나 신고 올랐다가, 당시 가드레일도 없었던 암벽을 타면서 거의 울 뻔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나누며 우정이 깊어졌다면 좋았겠다. 그 친구와 이래저래 연락이 뜸한 지 오래다. 이후 산은 철저히 내 삶에서 배제되었다. 


사진 1. 20년 만의 첫 산행길 정상에서 본 무지개

그 후로 20여 년이 지난 여름이었다. 아내와 함께 설악산에 가서 케이블카를 탔다. 그래도 설악산인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호텔 데스크에 가장 간단한 산행에 대해 물으니, 울산바위를 추천했다. ‘산도 아니고 바위니까 간단하겠군.’싶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섰다. 중반 즈음 올랐을까? 등산이라면 질색인 짝꿍의 등산화 양쪽 밑창이 떨어졌다. 나는 다시 호텔로 내려가 운동화를 들고 올라왔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흔들바위를 지날 즈음,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돌아가고 싶었지만 또 내려가는 건 더 싫었다. 내던져버리고 싶었던 2kg짜리 카메라를 가슴에 안고, 마지막 구간 철제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바위는 보통의 산보다 더 크고 높았다. 성급한 산행을 후회하며 가까스로 정상에 올랐다. 줄지어 서있는 거대한 바위들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광각렌즈로 풍경을 담으며 카메라를 가져온 스스로가 대견했다. 바위 건너편을 보니, 햇빛 떨어지는 속초시 위에 커다란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난 깨달았다. 다시 산을 오를 운명임을.


그 후로 난 왜 꾸준히 산에 오르고 있을까?


1. 등산은 인생과 같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비유는 뻔한 클리셰일 수 있다. 하지만 등산과 인생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1) 가던 길은 다시 돌아서기 어렵다. 지금까지 올라온 게 어딘 데 여기서 멈추는가? 나아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는 일생의 고민거리이다. 용감하게 올라가는 것도 좋다. 하지만 한계상황이 오면, 하산하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2) 스스로의 힘으로만 나아가야만 한다. 산행은 일상에서의 길과 다르다. 힘들다고 중간에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부를 수도 없다. 그렇다고 자전거, 킥보드, 휠체어 같은 다른 탈것도 무용하다. 오로지 자신의 두 다리로만 움직여야 한다. 길이 좁아지면, 나란히 갈 수도 없다. 홀로 가야만 한다.


3) 한 발씩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낮은 산도, 정상을 올려다보면 아득하고 멀게만 보인다. 한숨 쉴 필요 없다. 한 발 한 발에만 집중하면 된다. 걸음이 느려도 상관없다. 황급히 앞서 가던 사람이 종종 나중에 뒤처지곤 한다. 오로지 내 리듬에 맞춰 나아가면 된다. 문득 뒤를 돌아볼 때가 있다. 그러면 ‘언제 저길 가지?’가 ‘언제 여길 왔지?’로 바뀌어 있다. 내가 갈 길과, 온 길을 직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는 것, 등산의 매력이다.


2. 등산은 중독적이다.


등산은 힘들다. 나같이 천성이 게으른 사람은 작은 수고도 회피한다. 등산은 본질적으로 나와 맞지 않다. 아무리 낮은 산을 오른다고 해도 평온한 등산은 없다. 힘든 여정을 견뎌냈다는 뿌듯함, 정상에 올랐다는 성취감만으로는 내 굼뜬 몸을 움직이기에 충분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산에 오른다. 미적 경험의 본질은 쾌감이다. 정상에서 보게 되는 풍경은 숭고미의 극단적 형태이다. 일상에서 거의 볼 수 없는 크기와 규모의 형상들을 바라보게 된다. 높이 오를수록 풍경은 더 장엄하고, 감흥은 더 벅차오른다. 특히 산 정상으로 갈수록 길은 좁고, 경사는 더 가파르다. 헐떡이며 숨이 차오르는 가장 큰 고통의 순간, 가장 큰 보상이 주어진다.  탐미주이자에게 등산은 중독적일 수 밖에 없다. 산에 오르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3. 산림은 뇌를 회복시킨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휴식을 얻는다”는 명제는 참에 가깝다. 산 위에 올라서 보면, 왠지 마음이 평온해진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산은 “남에게 보이지 않고 볼 수 있는 (opportunity to see without being seen) 환경” 즉 생존에 유리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가수 김동률은 ‘산행”이란 곡에서 “난 마음이 복잡할 때면 늘 찾아가네… 일렁이는 맘 잠재워준다.”라고 노래했다. 흔히들 산에 오르면 잡생각이 줄고,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한다. 스탠퍼드 대학 연구자들은 19명의 피험자들을 90분 동안 각각 숲길과 도심 속 길을 걷게 한 뒤, 자기공명뇌영상으로 뇌기능 변화를 비교했다. 그 결과 숲길을 걸은 사람들에서 반복적인 부정적 반추 생각이 줄어들고, 우울과 관련된 전전두엽 영역의 활성도가 감소했다. 막스플랑크 연구소에서도 최근 더 많은 피험자 (63명)를 대상으로 더 짧은 시간(60분) 동안 걷게 한 뒤 비교해 보았다. 스트레스 자극에 따른 편도체(공포반응의 중추)의 활성도는 숲길을 걸은 사람들에서만 감소하였다. 즉, 숲길을 걸을 때, 머릿속 상념이 줄고, 뇌의 불안반응도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그림 2. 가상현실로 구현된 ‘인제 자작나무 숲길’과, 걷기 전후 뇌파 변화 비교

실제가 아닌 가상현실로 구현한 산림은 어떨까? 최근에 공대 교수진과 함께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길”을 가상현실로 구현하여 도심 속 걷기와 비교해 보았다. 60여 명의 피험자를 대상으로 가상현실 속 30분 걷기 전후 변화를 분석했다. 그 결과 도심 속 길보다 숲길을 걸은 사람들에서 심리적 평온함이 증가했고, 전전두엽 부위 세타파도 뚜렷하게 증가된 소견을 보였다 <그림 2>. 산림을 가상현실로 경험했을 뿐인데도, 정서적으로 평온해질 뿐 아니라 뇌도 안정화되도록 변화했다는 뜻이다. 자연에서 얻는 치유효과가 얼마나 근원적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4. 산행은 최고의 스트레스 해독제이다.


히포크라테스가 말했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산책을 해라. 그래도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으면, 다시 산책을 가라.” 생각은 생각보다 조절하기 어렵다. 마음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반면, 몸을 움직이면, 생각과 마음이 따라 움직인다. 최근 뇌과학 연구의 가장 큰 주제는 뇌와 몸의 긴밀한 연결성이다. 많은 연구들은 뇌가 생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움직이기 위해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로돌포 이나스는 인간의 생각을 “움직임이 진화를 거치며 내면화된 것”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인간이 가진 고도의 사고능력은 뇌가 움직임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예측하기 위해 진화한 부산물이란 뜻이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뇌는 본래의 목적에 맞게 기능할 수 없다. 요즘 진료실에서 환자 분들에게 가장 많이 권유하는 말 중 하나는 “움직이세요.”이다.


운동이 뇌건강에 미치는 효능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운동을 하면, 스트레스 반응이 중화되고, 정서가 안정되며, 집중력과 기억력 그리고 창의성까지 높아진다는 근거는 차고도 넘친다. 알고 있지만, 실천을 못할 뿐이다. 등산은 유산소 운동과 근력 운동이 적절하게 결합된 대표적인 신체활동 중 하나이다.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 쓰는 근육이 전혀 달라 조화롭게 운동을 할 수 있다. 스틱을 쓰면서 걸으니, 상하체의 전신운동 효과도 탁월하다. 자연환경에서 운동을 하면, 실내에서보다 힘든 걸 덜 느끼고, 더 오래 버틸 수 있다. 하산 시 관절보호와 안전사고만 잘 대비한다면, 등산만한 운동을 찾기도 어렵다. 


등산의 매력을 살펴봤으니, 이제 날머리로 내려와야겠다. 매사에 쉽게 싫증 내는 나 같은 사람도 3년째 진득이 산에 오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등산은 누구라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취미란 뜻이다. 등산을 하면 삶을 관조할 수 있고,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뇌를 잘 쉬게하고, 심신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요즘 산행에 나서는 이들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듯하다. 산에 오르는 젊은 커플들을 보면 참 대견하다. 등산은 여행과 운동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데이트도 하고, 건강도 챙기니, 요즘 젊은이들은 참 현명하다. 우울한가? 스스로에게 등산을 처방하라. 효과도 확실한데, 놀랍게도 무료이다.


SBS 프리미엄 칼럼.


<참고문헌>

Sudimac S, Sale V, Kühn S. How nature nurtures: Amygdala activity decreases as the result of a one-hour walk in nature. Mol Psychiatry. 2022 Nov;27(11):4446-4452. 


Bratman GN, Hamilton JP, Hahn KS, Daily GC, Gross JJ. Nature experience reduces rumination and subgenual prefrontal cortex activation. Proc Natl Acad Sci U S A. 2015 Jul 14;112(28):8567-72.


Nam SK, Kim SJ, Jang KW, Lee S-W, Jung HW, Kim U-S, Kim S, Song C, Roh D, Psychological and neurophysiological effects of a virtual reality forest environment with mindfulness integration: a comparative study with urban environment, Environmental Research (in submission) 


https://youtu.be/OLxnxmdsiT0



매거진의 이전글 정신과 의사가 본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