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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마치며, 나는 다시 떠날 궁리를 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18.10.12.-13.)

by 오호라
IMG_6099.jpg 안녕, 프라하

J와 나는 충분히 지쳐있었고, 나에게 이번 여행은 그 전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여행이었지만(다음 해인 2019년에 14박 15일 스페인 여행으로 이 기록을 경신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가는 길이 마냥 후련하고 즐겁지는 않았다. 이 여행을 통해서 막연히 품고 있던 유럽에 대한 환상은 이제 환상이 아닌 구체적인 행복으로 다가왔다. 나는 분명히 여행할 때 그 어느 때 보다도 행복했다.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여행하면서도 줄곧 또 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디든 계속해서 여행하고 싶다고. 그렇지만 끝이 있다는 걸 아는 여행이기에 즐거운 것이겠지. 끝을 준비하면서 이 순간순간을 최대한 만끽하자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리 둘도 없는 행복한 순간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겠지.


어쩌면 뻔한 생각이다. 결국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마음을 다잡으며 하는 생각. 사실 누구든 돈만 풍족하면 매일매일 여행하며 한량처럼 사치스럽게 여러 국가들의 명소를 다 돌아다니며 즐기고 싶을 것이다. 어쨌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만큼의 여유를 누릴만한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없기에 한계가 있는 여행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돌아오는 비행기의 기내식에서 포춘쿠키가 나왔는데 열어보니 이런 문구가 쓰여있었다.


“If your desires not extravagant they will be granted.”
(네 욕망이 사치스럽지 않다면?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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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tune’(운, 복) 쿠키에서 나올만한 말이라기엔 애매한 말이다. 기왕 운 또는 복을 주는 거라면 ‘사치스럽지 않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지 않으면 안 되나? ‘extravagant’ (사치스러운)의 기준이 어느 정도 인지 묻고 싶어 진다. 영어를 잘 몰라서 그 단어의 의미나 뉘앙스가 파악되지도 않는다. 어쨌든 일 년에 한 번 정도의 유럽여행은 나에게 사치스러운 것일까? 매년 올 수 있을까? 일 년에 두 번, 세 번의 장기 해외여행은 사치일까? 내가 돈을 많이 벌면서도 시간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이 된다면 그건 사치가 아니겠지. 내 처지에 따라 사치스럽다는 단어가 전혀 다르게 쓰일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씁쓸해졌다. 어쨌거나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며 내가 갖게 된 욕망, 그리고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열흘에서 보름 남짓한 해외여행을 즐기는 게 내게 그리 큰 사치가 아니길 바라며, 다음 여행을 기약한다.


라고 쓴 뒤, 1년 후 나는 J와 함께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고, 그로부터 몇 달 후 코로나19 팬데믹 시대가 왔다. 다시 생각해도 2019년 11월, 그때 스페인을 다녀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 2년 동안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동안 22살 때 처음으로 만들었던 여권이 만료되었고, 얼마 전 새로 여권을 만들었다. 그 사이 여권은 디자인이 세련되게 바뀌었다. 당장은 구체적인 여행 계획이 없지만 새 여권을 보며 두근두근했다. 곧 해외여행을 갈 수 있게 되기를 꿈꾸며 묵혀뒀던 여행기를 이제야 마무리한다. 그동안 이 여행기를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꺼내 읽으며, 읽는 김에 조금씩 손 봐서 새로 발행하며, 3년 전의 여행을 다시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어 다시금 행복했다. 시시콜콜 기록해 두었던 과거의 나, 칭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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