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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호라 Apr 14. 2022

그냥 걸었던 프라하 마지막 날

여행 마지막 날(18.10.12.)

출국을 하기 위해 오전부터 공항으로 가야 하는 마지막 날을 제외하고는 실질적 여행의 마지막 날이 왔다. 이번 여행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여행이자 최초의 유럽여행이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항상 새로웠고 매 순간이 즐거우면서도 그 순간이 지나갈 수밖에 없다는 게 아까웠다. 시간이 한없이 더디갔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충실히 지나버린 것이었다. 물론 나는 충실히 즐거운 여행을 했기에 여행의 끝도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날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예상했던 여행경비를 꽤 초과하여 더 이상 추가 환전을 할 돈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돈만 있으면 즐겁다고 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뭔가 더 하려면 무조건 돈이 더 많이 필요했다. 유럽여행을 하는 동안 생각보다 돈의 중요성을 더욱 뼈 아프게 느꼈다. 대학생 때 다들 유럽여행 한 번 정도는 가봐야 한다고들 얘기하고, 정말로 다들 한 번쯤은 가보는 건가 싶었지만, 사실 정말 큰 용기를 내어 대학생 때 죽어라 아르바이트한 돈과 부모님께 받은 용돈을 합쳐 여행을 했더라도 유럽까지 와서 돈 때문에 하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을 보다 많이 포기하며 덜 즐거운 여행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건 보다 어릴 때 용기를 내지 못하고 유럽을 더 어린 나이에 가보지 못했던 내 예상일 뿐이다. 최소 경비를 들여 유럽 여행을 했어도 유럽은 ‘내가 이곳에 있다’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감을 주는 장소인지도 모른다. 또 그 나름의 낭만과 재미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프라하 마지막 날 여행은 그랬다. 최소한의 돈으로 여행을 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숙소 근처 작은 슈퍼에서 우유와 함께 간단히 먹을거리를 사서 배를 채운 후, 숙소를 나섰다. 우리는 우선 무하의 ‘슬라브 민족 대서사시’라는 대형 프로젝트 전시를 하고 있는 프라하 시민회관을 가기로 했다. 표 값은 우리의 남은 경비를 모두 털어가 버렸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높이가 3미터 정도 되고 폭이 5~6미터 정도 되는 그리 큰 캔버스에 작업한 대작을 볼 기회는 거의 없었고, 미술전을 꽤 즐겨 다니는 나인데도 그렇게 큰 유화들을 열 점 이상 한 곳에서 본 간 처음이었다. 작품 한 점 한 점 보며 그 하나하나의 규모에 일단 압도되었다. 영어로 된 도록이 있어 작품과 관련된 스토리와 설명들이 쓰여있었는데, 처음엔 그걸 읽으며 내용을 파악하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영어가 너무 읽히지 않아 감상에 받는 것 같아 중반 이후부터는 포기해버렸다. 그래도 무하 박물관에서의 아쉬움은 그곳에서 충분히 달랠 수 있었다. 그제 꺼 보았던 무하의 장식적인 그림과는 완전히 다른 르네상스 화풍 같은 느낌의 유화였기 때문에 무하의 또 다른 작품세계를 알 수 있어 좋았다.


시민회관을 나와 길을 걸으며 굴뚝 빵이라 불리는 ‘뜨로들로’를 파는 곳이 워낙 많아서 또 사 먹고 싶었지만 우리 수중에는 정말 그만큼의 현금도 없었다. 그 이후부터는 어쩔 수 없이 모두 카드로 결제해야 했다. 뜨로들로를 카드로 결제해서 먹을 수는 없으니 나는 강렬한 욕구를 참으며 길을 걸었다. 다음 목적은 쇼핑이었다. 프라하에 오면 꼭 사야 한다는 맥주 효모 성분이 들어간 일명, ‘맥주 샴푸’를 사고 싶었기 때문이다. ‘Manufaktura’라는 브랜드였는데 프라하 시내에 위치한 매장을 찾아가니 한국인들이 역시 꽤 많이 찾는 탓인지 한국어로 된 설명이 주요 품목마다 붙어있었다. 우리는 적당히 맥주 샴푸와 바디 샴푸, 립밤, 보디 오일 몇 개를 골랐는데 2천 코루나를 넘기면 면세 혜택이 있다기에 그 금액을 채워서 쇼핑했다. 결국 공항에서 면세 혜택을 받기 위한 줄이 너무 길어 포기해버렸기 때문에 결국엔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땐 그럴 줄 몰랐다. 


우린 그 짐을 숙소에 두러 가기 위해 숙소로 돌아가다가 우연히 클라이밍 용품 판매점을 발견했다. 특별히 뭔가를 살 생각은 없었지만 우리는 그냥 반가워서 일단 구경하기로 했다. 나는 J를 약간 부추기긴 했다. 어치피 한국 가면 암벽화 사야 하지 않느냐고. 결국 J는 나의 꼬드김 약간과 실제 필요에 의해 라스포르티바 암벽화를 샀다. 충동구매라기보다는 나름 잘 따져보고 이것저것 신어보며 산 것이었다. 어쨌든 여행객이면서 여행자답지 않은 느낌의 쇼핑이었달까, 그렇게 프라하에서 암벽화를 샀다는 것 자체가 재밌었다. 게다가 J가 혹시 여기도 면세 혜택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점원에게 물어봐서 면세혜택을 이곳에서도 챙겼는데, 이 또한 결국 공항에서 포기하긴 했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뭔가 현명한 소비자가 된 느낌이었다.

'굳이' 프라하에서 구경한 암벽화

그렇게 마누 팍트라 화장품들과 암벽화를 양손 가득 들고 숙소에 풀어놓은 뒤, 조금 쉬다가 전날 사두었던 맥주를 들고 다시 밖을 나섰다. 숙소 근처에 산책하기 좋은 공원을 봐 두고 그곳에서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산책할 생각이었다. 블타바 강 중간의 작은 섬에 조성된 공원이라 여유로운 느낌이면서도 꽤 많은 관광객들이 산책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웨딩 사진을 찍는 커플도 보였다. 그들을 보며 그 순간을 프라하에서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다. 나도 물론 J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예쁜 커플이 부럽다는 생각을 한 건 워낙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공원에서 백조를 구경하고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놀이기구에서 놀기도 하다 보니 곧 어둑어둑해졌다. 이제 여행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즐길 차례였다.

숙소 근처에 있던 공원을 산책하면서-

마지막 만찬을 아무렇게나 때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구글 지도에서 평점이 높은 근처 음식점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구글 평점으로 5점 만점 중 4.5점이 넘는 곳이 우리의 목표였다. 공원에서 가장 가까운 음식점은 평점이 3점 초반대였기 때문에 그곳은 당연하게도 패스하고 우리는 만족스러운 마지막 만찬을 즐기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오로지 음식점을 찾아 낯선 길을 30분 가까이 걸었는데, 우리가 처음에 찾아서 열심히 걸어 도착한 곳은 예약석으로 이미 만석이 되어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음으로 갈 만한 곳을 찾아 10분 정도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걸었다. 그곳은 평점이 조금 더 낮긴 했지만 굉장히 독특한 분위기의 음식점이었다. 전체적으로 화려한 노랑, 빨강 원색의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고 지중해 음식을 파는 곳이었다. 그곳은 특이하게도 새들을 키우고 있었다. 음식을 먹는 중간중간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꽤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음식이 맛있었던 탓인지 그것조차 즐거운 곳이었다. 서빙하는 직원도 친절하고, 가게 규모에 비해 사람이 많지 않아서 여유로운 분위기였기 때문에 프라하를 또다시 온다면 또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언젠가 프라하를 또 오게 될 것 같았다. 프라하에서 만 3일을 보냈지만 이 도시에는 볼 게 아직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봤던 것도 또 보고 싶을 만큼 매력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까를교를 거쳐 숙소로 천천히 걸어갔다. 


까를교를 거의 다 건널 때쯤 아코디언 연주를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의 연주가 여행하는 동안 봤던 수많은 버스킹 중에 가장 감동적이고 멋있는 공연이었다. 까를교의 낭만적인 야경과 밤하늘을 나는 흰 새들의 무리가 그 풍경을 함께 장식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이 너무 아름답고 동시에 여행이 끝난다는 사실이 아쉬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핸드폰 카메라가 역시나 제대로 담지 못했지만, 마지막 날 버스킹을 볼 때 밤하늘의 풍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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