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는 없다.
아이와 함께한 일주일 간의 병원생활 후기
평온한 날이 계속되었다.
아이들이 한 달 넘게 병원에 가지 않았다.
지난겨울부터 감기와 중이염을 달고 살던 둘째도 초여름에 접어들며 계속 컨디션이 좋았다.
사무실에도 큰 이슈없이 조용한 날 들이 계속되었다.
폭풍 전 고요였을까?
보통의 월요일이었던 날.
장마의 초입이라 일주일 내내 전국에 비가 쏟아질 것이라고 했다. 점심식사 후에 동료와 차를 마시며 '아이들이 하도 아파 한약을 먹였는데 신기하게 그 후에 잘 아프지 않아요.'라는 얘기를 했다.
사무실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있는데 진동이 울렸다.
'유치원 선생님'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오실 분이 아니다. 순간 불안이 엄습했다.
"어머니. 레레가 열이 많이 나요."
걱정은 되었지만 그렇게 큰 일이라고는 생각 못한 채 친정엄마에게 아이 하원을 부탁드렸다. 그런데 잠시 후에 선생님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어머니. 레레가 이상해요. 입술이 파래지고 몸이 경직되는 것 같아요. 119를 불러서 병원으로 가야겠어요."
무슨 정신으로 병원까지 내달렸는지 모르겠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우산을 챙길 겨를도 없이 차로 뛰어가 운전대를 잡았다. 아이는 의식이 없다고 했고 자꾸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내리는 비로 하늘도 울고 나도 울었다.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응급실에 도착했다.
막상 아이의 얼굴을 보자 3년 전 이맘때 한 번 겪었던 일이라서인지 생각보다 의연할 수 있었다.
아이는 약물을 투여하고 여러 가지 검사를 받은 후 한참이 지나서야 의식을 찾았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입원이 결정되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 밤늦게서야 입원 병동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아이는 꼬박 3일간 39도 이상의 고열이 났고 그 이후에도 완전히 열이 떨어지기까지 3일이 더 걸렸다. 그렇게 총 7일간의 입원생활이 시작되었다.
입원병실은 5인실이었다. 한편에 셋, 반대편에 두 자리가 있는 병실이었고, 아이 다섯에 보호자 다섯까지 총열명이 사용하는 공간에 화장실이 한 개 있었다. 우리 자리는 하필이면 침대 세 개가 놓여있는 편의 가운데 자리였다. 아이의 열로 경황이 없기도 하고 비용에 대한 염려도 없지 않아 일단 지내보기로 했다.
병실은 대환장파티였다. 모든 침대가 커튼으로 가리어져 보호자나 환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얇은 커튼 한 장이 소리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장염에 걸린 건너편 아이가 종일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소리, 밤새 들리는 옆자리 아이의 기침 소리, 거기에 아이 병시중에 지친 엄마가 잔뜩 짜증 담은 말투로 아이를 혼내는 소리, 수시로 드나드는 간호사들의 소리까지 병실이 24시간 멈추지 않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하필 폭염에 장마까지 겹쳤다. 24시간 에어컨이 작동되었지만 정부 정책에 따라 실내온도 26도를 유지한다는 방송이 수시로 흘러나왔다. 열명이 한 공간에서 숨 쉬고 누워있으니 에어컨이 있으나마나 종일 덥고 공기마저 답답했다.
어른인 나야 그럭저럭 지낼 수 있지만 원래도 성격이 예민한 편인 데다 고열로 낑낑대는 레레에게는 무척이나 고역이었던 것 같다.
이러다 아이 상태가 호전되기는커녕 장염이나 이름 모를 바이러스의 기침감기까지 얻어갈까 걱정을 쌓다가 결국 3일 만에 3인실로 옮겼고 아이는 그제야 조금 편안해졌다. (어차피 옮길 것이라면 하루라도 서두를 것을)
바깥세상에서는 이제 더 이상 코로나가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데 병원에는 여전히 코로나 음성이 확인된 보호자 한 명만 상주할 수 있다. 남편과 교대를 할 때마다 동네 병원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하니 비용도 부담되고 집에 있는 둘째의 육아도 문제였다.(증상이 있는 환자의 코로나 검사 비용은 건강보험 혜택을 받아 몇 천 원이면 되고, 보호자 상주를 위한 검사 비용은 몇 만 원이 든다.)
남편이 병원에서 입원한 첫째 아이의 보호자로 있던 날, 남편과 교대를 하기 위해 둘째를 데리고 동네 병원에 가서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대학병원 1층 원무과에 코로나 음성확인서를 제출하고 보호자 교대를 해야 하는데 하필 첫째가 막 잠이 들어 아빠와 함께 내려올 수 없었다.
첫째에게 "수액을 달고 있으니 절대 침대 밑으로 내려오면 안 돼. 엄마 금방 올게."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니 아이가 침대 밑에 내려와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다 보니 혹시라도 중간에 잠에서 깨어나 돌발행동을 할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원무과에 사정을 설명하여도 병원 내에 보호자는 오직 한 명만 가능하기 때문에 보호자 교대는 무조건 원무과 앞에서 해야 한다고 했다. (그 태도 또한 내가 느끼기에는 너무나 단호하고 차가웠다.) 그래서 결국 자고 있는 아이를 병실에 혼자 남겨 두고 남편이 서둘러 내려왔다. 나는 남편에게 둘째를 바통터치 하듯 넘긴 채 서둘러 병동으로 올라갔다. 갑작스러운 헤어짐으로 둘째는 그 자리에서 울음이 터졌고 안 그래도 아이의 입원으로 마음이 약해진 나도 잠든 첫째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병원의 철저한 방역 대책은 칭찬할만한 것이지만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 순간엔 나도 모르게 모든 게 서운했던 것 같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하는 막막함, 아픈 첫째로 인한 불안감, 울고 있는 둘째에 대한 미안함으로 범벅된 마음이 원무과 직원의 나를 나무라며 따지는 듯한 말투로 인해 둑이 터지듯 터져버린 듯했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일주일을 지내고 첫째는 무사히 퇴원하여 일상에 복귀했다. 그리고 열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둘째의 고열이 시작되었다.
병원에서의 짧은 며칠을 통해 그저 오늘 주어진 하루. 건강하게 일상을 살아냄이 더없이 소중하고 감사한 일임을 오랜만에 상기했다.
거기에 더하여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도 이 아이에게 건강과 행복 이상의 것은 바라지 않겠다 다짐했다.
병원에서의 단 하루도 타는 듯한 마음인데 하루하루 가슴 졸이며 기약 없는 병원생활을 이어가는 모든 환아들과 또 그 부모님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응원하고 또 위로하고 싶다.
거기에 더해 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셋째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아들만 둘이라 늘 막내딸에 대한 은근한 로망을 가지고 살았었는데 아이가 크게 아프고 보니 마음을 분명히 정할 수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 한 아이가 아플 때 남은 가족들이 분담해야 할 몫이 너무 크다. 부모 중 한 명은 휴가를 내고 병원에서 종일 아픈 아이를 간호하고 나머지 한 명은 집에서 남은 아이를 돌보며 일도 해야 한다. 아이가 둘이니 남편과 역할을 나누고 온 가족의 도움을 받아 그럭저럭 해냈지 아이가 셋 이상인 부모들. 더군다나 워킹맘들은 도대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일까?
둘. 아이가 아플 때 골든타임 내에 제대로 된 진료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 자신이 없다. 아이는 당분간 예방차원의 약을 복용할 예정이다. 당분간이지만 언제까지가 될지 기약은 없다. 그 때문에 경과에 따라 응급실을 찾을 가능성이 이전보다는 더 높아졌다. 소아청소년과 의사 부족으로 응급실을 가지 못해 사망하는 아이들의 소식을 종종 접하면서도 문제를 피부로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 일을 겪으며 '이게 남의 일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아이가 늘어날수록 응급실이나 소아과 병원을 찾을 일이 배로 늘어날 텐데 그때마다 좋은 의사 선생님을 제때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반복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고로 내 바람 속에 지내던 막내딸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