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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봉봉 Aug 04. 2024

미니멀리즘에 더 빠지기 전에 가방을 샀다

우울증이랑 미니멀이랑 뭔 상관인데


 옷장을 열면 옷이 후두둑 떨어졌다.

 옷이 켜켜이 쌓인 옷장에서 귀신이 나올 것 같았다. 어릴 때 넉넉하게 크지 못해서 옷 욕심이 그렇게나 많았다. 궁상맞은 성미에 시원하게 지르지는 못 하고 매번 싼 옷들만 잔뜩 사대니 한 철이 지나면 옷이 엄청 쌓여갔다. 계절 맞춰 딱딱 꺼내고 정리하는 성격도 아니라 어떤 옷은 구석에 정리해서 넣어뒀다가 있는 줄도 모르고 한 해를 지나쳐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몇 년 전부터는 이제 싼 옷은 그만 사야겠다 하고, 이제는 비싸도 질 좋은 옷을 사야겠다며 비싼 옷들을 사기 시작했다. 그런 옷들은 비싸게 주고 샀으니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옷장이 터져나갔다. 그걸 보는 나의 정신도 터져나갔다. 옷장 속이 내 머릿속 같았다.



 옷을 버리기 시작했다.

 미니멀리즘 그런 건 모르겠고, 일단 주워들은 건 있으니까 최근 1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은 옷들을 모조리 다 버렸다. 아까운 것들도 있었고, 멀쩡한 옷들도 있었지만 냉정하게 다 갖다 버렸다. 가전제품 같은 것들은 당근에 팔 수라도 있지, 입던 옷들은 팔 수도 없었다. 쓸데없이 기억력은 좋아서는, 버리는 옷을 골라낼 때마다 그 옷의 가격이 막 생각났다. 유행이 뭐라고 몇 번 입지도 않을 옷들을 이렇게나 사제꼈는지. 패션 유튜브를 봐가면서 계절마다 올해 유행하는 트렌드도 파악해서 옷도 사고 했었는데,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부끄러워졌다. '내가 뭐라고 유튜브까지 봐가면서 패션에.. 하, 참 나!'


 여하튼 옷을 엄청 버렸다. 며칠 동안 미친년처럼 계속 버렸다. 아까운데 버리고 또 버렸다.

 버려지는 옷들은 싸구려 거나 어울리지도 않는데 유행하니까, 혹은 할인율이 높아서 산 옷 들이었다. 또 비싸게 주고 샀어도 아끼느라 못 입은 것들은 유행이 지나버려 버리게 되었다. 싸나 비싸나 다 버렸다.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옷은 매일 입는 세인트제임스 줄무늬 죄수복 티셔츠와 건조기에 막 돌려도 되는 가장 편한 청바지 몇 개였다.

 가방은 친구들에게 나눠줬다. 기분전환으로 아무 생각 없이 샀던 가방들이 우리 집에서는 바깥공기를 몇 번 못 쐬었지만, 내 친구들 기분을 전환해주고 있었다. 이것도 비움의 미학인가..

 


 창고를 비우기 시작했다.

 아이 3살 때 눈사람 만들던 스키장갑, 6년 전 괌 갈 때 샀던 스노클링 마스크, 이유를 모르겠는데 계속 버리지 말라고 하는 남편의 20년 된 보드복. 해외여행 갈 때마다 지인 선물 줄 거라며 잔뜩 사 왔던 기념품과 특산품들이 썩지도 않은 채로 창고에 몇 년 동안 박혀있었다. 5년 된 싱가포르 호랑이 연고, 7년 된 남아공 바디크림, 4년 된 인도산 립밤. 나눠줄 친구가 없었던 내 인간관계 문제였나. 여튼 다 버렸다.  



 책을 버렸다.

 우리 집엔 거실에 티비가 없고 책꽂이가 있다. 거실에서 모두가 책을 보는 아름다운 장면을 상상하며 거실의 서재화를 외치며 전면에 책장을 박아 넣었다. 이 집에 산 10년 동안 과연 거실에서 가족 4명이 둘러앉아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그냥 티비나 큰 거 있었으면 집이 지저분해 보이지는 않았을 텐데, 거실에 가득 찬 책장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니 책장도 내 버림굿의 대상일 뿐이었다. 매번 책 정리를 해도 이건 5학년 필독 도서인데, 이건 좀 크면 읽을 텐데 하고 살아남았던 책들도 모조리 다 폐기 대상이었다. 첫째가 중학생인데 초등학교 저학년이 보는 역사전집이 꽂혀있었다. 싸그리 다 버렸다.

 가장 시원하게 버린 책들은 공부법에 관한 책들이었다. 잠수네 영어공부법이나 몇 학년 공부가 평생 성적을 좌우합니다 같은 류의 책들. 우리 애들 교육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는데 그냥 이 책 저자들한테 인세나 기부했네 싶었다. '서울대 가는 법' 책을 보아도 서울대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온 국민이 다 아는데 육아서나 공부법 책은 왜 그렇게 사서 읽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과일이나 사 먹을걸.

 남편은 결혼할 때 전공책 따위는 가지고 오지도 않았는데, 내 전공책은 왜 다 짊어지고 왔는가. 책꽂이에 꽂아두면 왠지 지성인이 된 것 같은 느낌으로 갖고 있었던 전공책들도 모조리 다 쓰레기통 행이었다. 미적분학, 해석학, 선형대수학, 미분기하학, 복소해석학, 위상수학.. 어후. 다 가라. 이제 수학도 싫다. 안녕.



 주방도 가관이었다.

 4년 된 미역이 나왔다. 이것은 미역인가 미역 화석인가. 화석이 되어버린 식재료만 문제가 아니었다. 요리 실력도 없고 예쁘게 플레이팅 할 센스도 없으면서 그릇 욕심은 많아 지나가다 이쁜 그릇이 있으면 사모았다. 옷은 보풀이라도 있지, 그릇은 깨지지 않고서야 버릴 이유가 없었는데 많다는 이유로 버리자니 너무 아까웠다. 열받을 때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그릇 아울렛에 가서 하나씩 사 온 것들인데 (그래서 세트도 아니고 서로 조화도 안 맞는다), 그 그릇을 살 때의 추억이 생각났다. '아, 이거 남편이 빡치게 했을 때 가서 사 온 건데' 하는 생각에 가격까지 선명히 생각났다. 열받았을 때 산 그릇들은 다들 비싸게 주고 산 것들이라 정리하기 더 아까웠다. 아낀다고 구석에 넣어두고 쓰지도 않아서 정말 몇 번 안 썼는데 음식 담는 그릇들이 아끼다가 다 똥이 되었다. 그래도 완전히 똥이 된 것은 아니니 가장 비싸고 예쁜 그릇들은 버리지 않고 제일 손이 많이 가는 곳에 배치했다. 진짜 똥 되기 전에 쓰다가 깨져서 버리면 아깝지는 않으니께.


 와. 이거 뭐냐.

 대체 내가 집구석에 쓰레기들을 얼마나 이고 지고 살았던 것이며, 이렇게 쓰레기가 될 것들을 돈을 주고 다 사 왔다니 내 뺨때기를 한대 갈기고 싶었다. 정신 차려라. 진짜.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미니멀리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미니멀리즘 카페에 가입하고, 미니멀리즘 책을 빌려와서 읽었다.

 미니멀리즘의 세계에서는 나는 그 자체로 쓰레기였다.

 돈도 계획 없이 쓰고 쿠팡이며 네이버를 비롯한 각종 멤버십은 있는 대로 가입한 인간이었으며, 포장도 안 뜯은 입지도 못한 옷들이 옷장에 쌓여있고, 사고 싶은 건 어떤 이유를 만들어내서든지 합리화해서 샀던 뇌가 없는 소비자.


 사람들은 수학 선생이라 하면 엄청나게 계획적이고 계산적인 삶을 살 것 같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플러스 마이너스는 수학책에서나 하는 일이다. 나에게는 한 달에 한번 월급날 플러스가 있고 그 나머지날들은 마이너스의 연속인데 그 마이너스의 총합을 모른다. 엄청난 빚은 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엄청난 적자가 아니라는 사실만 흐릿하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소비생활도 엉망이라 필요한 게 있으면 무조건 샀다. 쿠팡과 네이버에는 없는 것이 없고 오늘 주문하면 내일 새벽에 집앞에 갖다준다. 밀어서 결제하기 버튼만 누르면 된다. 난 없는 것만 살뿐이라는 이유를 대며 없는 것들만 샀는데, 나중에 보면 있었던 것들도 있었다. 집 안에 있는 걸 아는데,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사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정리를 안 하니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있나.



 왜 이렇게 살았나.



 내가 무얼 사는 과정을 생각해 보건대, 필요해서 샀다기보다는 빡쳐서 산 경우가 더 많았다. 나의 감정과 기분을 제대로 바라보고 풀거나 하지 않고 돈으로 기분을 풀었다. 엄청나게 큰 것들을 산 것도 아니었고 평생을 함께할 물건들도 아니었지만 아껴서 똥 될 쓰레기들만 돈을 주고 사 모았다.


 아. 열받아. 빡쳐.

 옷 하나 사야겠다.

 신발 하나 사야겠다.


 이렇게 자기 전에 숙제처럼 결제를 하며 '에이씨, 이거라도 샀으니까 됐다. 그냥 자자'로 매일을 살았었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나름의 소비 지연의 목적으로 장바구니로 먼저 담아뒀는데(사실 찜의 목적이 더 컸다), 쿠팡 장바구니에는 생활용품만 50만원, 네이버 장바구니에는 870만원치가 담겨있었다. 이걸 다 사지는 않았으니 돈을 아낀 건가..



 나는 미니멀리즘 책이나 카페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하루에 식비를 15000원만 쓴다거나, 제로웨이스트를 위해 플라스틱 용기를 전혀 안 쓴다거나 그럴 자신이 없다. 가계부도 써보려고 했지만 한 달을 꾸준히 써본 적이 없다. 계절별로 옷 다섯 벌만 남기고 다 버린다거나 1년 동안 옷을 안 사거나 하는 결심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할 생각이 없다. 그래도 미니멀리즘의 근처에서 늘 서성이기는 해보려고 한다. 카페나 책을 통해 그들의 삶을 보고, 나의 삶을 빗대어보면 싸구려 니트에 붙은 보풀같이 너저분한 내 생활을 체감할 수 있다.


 도서관에 가서 미니멀리즘에 관한 책은 꼭 한두 권 끼어 빌려오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어렵고 호흡이 긴 책들 사이에 미니멀리즘 책을 끼워 잠깐씩 읽는다. 아주 제대로 된, 깔끔한 아이스 녹차를 마시는 기분이다. 이 책들에 나오는 정도의, 완전한 의미의 미니멀리스트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미니멀리즘의 근처에 나를 묶어두는 '목줄'의 의미로 그 책들을 앞으로도 계속 빌리고, 읽을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버리면서 뭔가를 느꼈다. 물건은 자꾸 버려 집에 물건은 자꾸 없어지는데, 생겨버린 공간만큼 내 정신에도 여유공간이 생기는 것 같았다. 비우면 채워지는 것들. 이런 이야기가 잘난척하며 감성부림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무슨 말인지 진짜 느껴버렸다.


 우울한 사람치고 깨끗한 사람 없을 것이다. (있으면 죄송합니다.) 몸이 천근만근 움직이기 힘들어 씻기도 힘든데 집안정리는 둘째 치고, 밥 차려먹고 그거 치우기도 힘들다. 정리와 청소는 아주 먼 우주에서나 일어나는 빅뱅 같은 일 일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쬐끔이라도 괜찮아졌다, 혹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생각이 들면 집정리를 해보기를 권한다. 정확히는 버리기를 권한다. 다 버리자. 나도 모르게 사모은 물건들이 내 정신을 흐트러트리고 있을 것이다. 나를 감싸 누르고 있는 수많은 물건들은 나의 쓸데없는 욕심과 해소되지 않은 감정의 찌꺼기의 상징일 수도 있다. 그것들을 깡그리 다 갖다 버리고 집도 비우고 내 정신도 비워보자.


 미니멀리즘, 한 번 해보시라.

 매력 있다. 빠져버렸다.

 설명하기는 힘든데, 정신이 맑아지는 효능이 있다.


 그런데 사실은, 미니멀리즘에 너무 빠질까 봐 조금 겁이 난다. 나도 모든 걸 버리고 계절별로 세벌씩만 놔둔다거나 거실에 소파도 없애버리고 빈집같이 아무것도 없는 집에 살게 되면 어떡하지? 예전엔 심심하면 쇼핑몰가서 한 바퀴 구경이라도 하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는데, 옷을 한참 버리고 나니 사는 것도 무의미해져서 욕심도 없고, 구경해도 재미도 없다. '어차피 사봐야 뒤에 버릴 건데..' 하는 생각이 스쳐가면 물욕이 떨어진다. 이러다 죽는 아니겠지?


 그래서 미니멀리즘에 더 빠지기 전에 미국 출장 가는 남편에게 면세점에서 가방을 사 오라고 부탁(명령)했다.

 왜냐면, 진짜 미니멀리스트가 되면, 가방 같은 거 못 사쟈나옹. 치팅데이 같은 개념?

 이제는 가방 안 사려구요. 진짜.






다음 이야기 : 불면증에는 독서가 직빵이지!

+ 내가 얼마나 무식한 인간이었나를 깨닫게 되었다

+ 왜 이 세계를 모르고 유튜브만 보고 있었을까

+ 이제 아이들 책은 뒷전, 종합자료실부터 직행한다

+ 어디 가서 글 쓴다고 함부로 입 놀리지 말아야지..

+ 책을 읽는데, 읽을 책들이 계속 늘어난다.

+ 우울한 동지들이여, 지금 당장 휴대폰을 놓고 책! 책!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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