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스타 타고 파리로 넘어가기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저희에게 매일매일 가장 맛있는 아침을 선사한 호텔의 조식을 어느 때보다도 천천히, 맛있게 먹고
짐을 싸고 밖으로 나가서 우버를 부릅니다.
아들은 여행 전부터 런던에 가면, 가장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가 런던의 블랙캡이라고 불리는 까만색 택시를 타고 싶어 했습니다. 택시를 부를 때는 아들의 니즈를 까먹고 아무 생각 없이 제일 싼 걸로 불렀는데, 부르고 나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으니 아들이 블랙캡이 오려나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블랙캡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죠.
드디어 택시가 왔습니다. 도착한 택시는 도요타.... ㅋㅋㅋ
아들은 울상을 지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겠습니까?
블랙캡은 다음에 타라.. 미안.
무사히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 도착했고, 일찍 준비해서 온 덕분에 시간은 꽤나 남았습니다. 일단 이제는 더 이상 쓸 일이 없는 오이스터카드(교통카드)부터 보증금 환불을 받고, 잔액도 털었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파운드로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런던에서 마지막 식사인데, 생각보다 파운드가 많이 남아 여유롭게 먹을 수 있는데 맛있는 식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손님이 많고 메뉴도 일반적인 그림(?)이 있는 곳으로 골라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왔습니다. 아.. 네.. 그냥 영국맛. ㅜㅜ 끝까지 맛있는 음식은 못 먹어보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남기고 나옵니다.
아직까지 못 쓴 파운드화를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M&S샵에 가서 한 푼도 남기지 말고 다 쓰고 오도록 미션을 내렸습니다. 예상치 못한 보너스에 아이들이 M&S샵으로 가서 친구들에게 줄 초콜릿과 사탕, 기차 안에서 먹을 과일과 파스타(아직 배가 고파서요..)를 마구 담기 시작했습니다. 딱히 기념품이나 선물이라고 살 것이 마땅치 않았는데, 또 일정도 빡빡해서 제대로 구경할 시간도 없었고요. 그런데 M&S 샵에 초콜릿과 사탕들이 포장도 엄청 예쁘고, 가격도 저렴해서 마구 담기 딱 좋더라고요. 남은 파운드화로 탕진잼을 만끽하고서는 이제 탑승 수속을 하러 갑니다.
저도 유로스타는 처음이라서 살짝 긴장되는데요. 어쨌든 항공이랑 비슷하게 기차 번호를 확인하고 안내되는 게이트로 들어갑니다. 안쪽은 엄청 사람들이 많고 혼잡합니다. 긴장했던 것에 비해서 런던은 소매치기라던가, 분실의 위험은 체감하지 않고 안전하게 잘 돌아다녔는데, 여기서부터는 바짝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출국 수속을 합니다. 아이들이랑 같이 오라고 해서 셋이 같이 심사를 받는데, 여권을 보던 직원분이 묻습니다. 영어로.
"너네 한국 여권이 왜 색깔이 두 가지냐? 초록색도 있고 남색도 있고 왜 이렇냐?"
저의 여권은 예전 거라 초록색이고, 이번에 새로 발급받은 아이 둘의 여권은 바뀐 디자인인 남색 여권이었기에 궁금해할 만도 하죠. 그 이전부터 궁금했는데, 그걸 저희한테 물어보나 봅니다. 그래서 저는 바뀌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려고 했죠. 웃음을 띠며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K-이미지가 있으니까요.
"Hmm.. it's.. exchanging!"
옆에 있던 딸이 기겁을 하며 팔을 툭툭 칩니다.
"엄마! 익스체인지는 환전이잖아!! 뭐래는 거야!"
아.. 맞네요. 그냥 change라고 했어야 됐는데..
딸이 황급히 다시 체인지되고 있다고, 제대로 말해줍니다.
사실 호텔에서도 "땡큐"에는 "유얼웰컴", "쏘리"에는 "댓츠오케이" 이 콤보를 헷갈려서 잘못말했다가 또 망신당한 적이 있었거든요. 엘베에 타면서 어떤 사람이 "땡큐"라고 했는데 제가 거기다가 "댓츠오케이"하고, "쏘리"라고 했는데 "유얼웰컴"이라고 해서 아이들이 또 그렇게 배를 잡고 웃었지 말입니다.
뭐, 안 익숙한데 어쩌라고요. 그 뒤부터 그것만 계속 생각하니 더 헷갈리더라고요. 왜 헷갈리죠? ㅋㅋ
어쨌든, 한국 여권은 환전 중이라는 정보를 전달하고, 기차로 갑니다. 세인트 판크라스 역과 킹스크로스 역은 그 역 자체로도 아름답고 웅장한 맛이 있는데요, 사진으로라도 담고 싶은데 아이들이 그저 빨리 타자고 재촉합니다. 그리고 조금 신나기도 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나라를 넘어가 본 적은 없으니까요. 우리나라는 외국을 가려면, 말 그대로 바다를 건너야 하는 '해외여행'을 해야 되니까요. 기차로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것도 신기한데, 섬나라인 영국에서 해저터널을 통해서 유럽대륙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 또 신기합니다.
기차를 타고 좌석을 찾아 앉았습니다. 여행 오기 전에 후기를 보니 유로스타에서 트렁크를 통째로 들고 갔다, 백팩을 통째로 서리당했다, 하는 무서운 후기들이 있어서 아이들은 좌석에 앉혀놓고 저는 옆에서 짐을 지켜야 하나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트렁크를 짐칸에 쌓다 보니 우리 트렁크 위에 또 다른 사람이 트렁크를 쌓고, 옆에 또 가방을 밀어 넣고 가방들이 빈틈없이 짜부가 된 상태였습니다. 이걸 어떻게 털어간다는 거지? 도저히 상상이 안 갔지만 그런 역경을 이겨내고도 성실하고 치밀하게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므로 일단은 준비해 온 긴 끈으로 된 자물쇠를 가방끼리 묶고, 또 옆에 있는 기둥에도 묶었습니다. 하면서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저희밖에 없어서 약간 부끄럽기도 했지만, 가방 다 털리고 후회하느니 이게 낫겠다 싶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꽁꽁 묶었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지키고 있는 것은 진짜 오버 같아서 일단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가기로 했습니다. '열차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설마 저걸 끊고 가방을 들고 가겠어?' 하는 마음이었죠.
열차에서는 백팩을 모두 앞쪽으로 안고 수상한 사람들을 잘 관찰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공간이 익숙해지니 경계하는 것도 느슨해지더라고요. 한 30분 지나서는, 특별히 움직이는 사람도 없고 어차피 프랑스에 도착할 때까지는 정차역도 없어서 그냥 마음 편하게 가기로 했습니다.
딸이 탕진잼으로 산 파스타와 과일을 뜯어서 같이 먹었는데, 역시나 파스타는 또 맛이 없었습니다. 이쯤 되니 쓰면서도 영국한테 미안하네요. 맛있는 게 분명히 있긴 있을 텐데, 저희가 지독히도 운이 없는 거죠?
다음에는 저희가 꼭 찾아볼게요..
남매 둘이 이상하고 시끄러운 게임을 하며 낄낄대고, 저는 또 눈치 보며 조용히 시키고 하면서 달려오니 어느덧 시간이 지나고, 누가 봐도 영국과는 다른, 확연히 드넓고 푸르고 평평한 들판이 펼쳐집니다. 이것이 올리브와 포도를 키워내는 비옥한 프랑스의 땅인가! 싶네요. 뭘 키워도 잘 클 것 같은 풍요로운 느낌이 납니다.
조금 더 달려서, 드디어 악명 높은 파리 북역(Gare du Nord)에 도착합니다.
파리 북역은 치안이 안 좋기로 유명한데요. 런던을 잇는 유로스타가 오가는 역이기도 하고, 여러 철도 노선을 통해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를 잇는 역이기 때문에 규모와 이용 인원이 엄청납니다. 왜 그렇게 무서운 북역이라고 하는지, 딱 내려보니까 알 수 있었습니다. 뭐 누가 위협을 가한다거나, 수상한 무리가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양한 인종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역 플랫폼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체로 부산스럽고 주의가 흐트러지기 딱 좋더군요. 마음먹고 소매치기를 하기에 딱 적절한 장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희처럼 두리번거리는 사람들도 한 둘이 아니고요.
일단은 교통카드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파리 교통카드에 대해서 찾아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파리 교통카드 종류가 겁나 많습니다. 1회권/ 까르네 / 나비고 / 모빌리스라는 게 있고, 그것도 데이티켓, 위켄드, 패스 뭐 난리 납니다. 기간마다 다르고, 어느 구간까지 이동할 건지에 따라서 적절한 교통카드가 다 다릅니다. 알아보고 비교하다가 멘붕에 걸렸습니다. 비슷한 시기와 일정으로 여행 가는 지인에게 뭐 사야 될지 알려달라고 하니 <나비고 패스 주간권>을 사라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이 카드는 사람이 있는 매표소에서만 구매할 수 있고, 카드 구매 시에는 사진이 필요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진도 준비했습니다. 야무지게. (이 정도면 야무지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파리 올림픽을 위한 치안강화 때문이었다고는 하던데, 총을 멘 군인인지 경찰인지가 역 곳곳에 배치가 되어있어 조금 더 무서운 느낌이 났습니다. 시골쥐처럼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교통카드 파는 곳을 찾아보았지만 혼잡한 인파와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휩쓸려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각자 엄청난 무게의 캐리어도 들고 있었고요. 또 보호해야 했고요.
마침 앞에 있던 직원에게 <나비고>를 파는 곳이 어디냐고 했더니, 지하로 내려가라고 해서 알려주는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두리번거리고 있는 동양인 가족을 따라 눈치껏 따라갔습니다. 매표소를 찾았습니다. 저희 차례가 되었습니다. 성인 1명, 칠드런 2명을 끊어달라고 하고 사진을 한 장씩 내밀었습니다. 매표소 아저씨가 3명을 끊을 거면 사진 3장을 내라고 계속 말합니다. 제가 3장을 줬지 않느냐라고 하니, 계속 3장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희 딸 사진과 제 사진을 손에 들면서 이거 똑같은 인간 아니냐고 저에게 묻습니다. 저도 외국 영화 보면 이 놈이 저 놈인지, 저 놈이 이 놈인지 구별을 잘 못할 때가 많은데 이 분도 그렇나 봅니다. "디스 이즈 미, 디스 이즈 마이 도럴"이라고 말하며 저희 딸의 얼굴을 데리고 와서 얼굴을 들이밀어 줬습니다. 그랬더니 막 웃으며,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며 "쏘리"라고 합니다. 덕분에 긴장이 조금 누그러지면서 같이 빵 터지기는 했지만, 갑자기 카드는 안 된다면서 현금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카드도 분명히 된다고 들었는데 왜 안되는지 궁금했지만, 뭐 묻기는 할 수 있어도 대답을 못 알아들을 것이 무섭기 때문에 질문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냥 있는 현금의 대부분을 교통카드 사는 데 다 털어서 씁니다. (이것이 곧 엄청난 재앙을 불러옵니다. ㅋㅋ)
자, 이제 교통카드도 샀겠다, 이제 나가면 됩니다.
낭만의 파리!
아름다운 파리!
어느새 깜깜해진 파리가,
파리에서의 첫날밤의 낭만을 선사해 줄까요?
돈 싫어하는 사람 있습니까? ㅋㅋ
어른이야 여행 가면 자기가 알아서 사고 싶은 거 사고, 쓸데없는 것도 사고, 와서 후회도 하죠. 하지만 우리 사춘기들은(어린이도 포함) 사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고, 여기서나 거기서나 항상 돈에 굶주려 있습니다. 돈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여행 중에 한 번쯤 사춘기에게 탕진잼을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요?
특히, 출국하는 날이나 다른 나라로 이동할 때 남은 현금을 (물론 너무 많이는 말고요) 탁! 털어서 쿨가이 부모인 척하면서 "이 돈 (언제까지/ 지금 당장/ 여기서) 다 써라. 다 안 쓰면 죽인다. ㅋㅋ"라고 하며 마음껏 돈을 쓸 수 있도록 하면 너무나 행복해할 것입니다.
어차피 남은 현금, 들고 와봤자 다시 환전하기도 힘들죠. 기념이라고 집에 놔둬봤자 짐만 된다는 거, 다들 아시잖아요? 어차피 장롱으로 들어갈 지폐들, 시원하게 사춘기들한테 생색내면서 쏩시다.
최고의 골든벨, 멋있는 우리 엄마, 아빠!
나이 들 수록 사랑은 돈으로 표현........................ 하는 것이라고 하던데요..
사춘기들이 힘들게 하긴 해도, 부모도 자식을 누구보다 많이 사랑하니까요. 하하하하
우리나라에서는 못 하는 경험이지? 기차 타고 다른 나라 가는 거 말이야.
유로스타는 1994년에 개통했대. 벌써 30년이나 되었나 봐. 좋겠다. 기차 타고 2시간 조금 더 있으면 런던에서 파리까지 온다니 너무 부럽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다른 나라랑 연결되어 있으면, 다른 나라도 많이 다니고 더 넓은 세상에서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이렇게나 많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다음번에 오면 다 돌아다녀보자.
암스테르담, 브뤼셀 다 갈 수 있으니까, 너무너무 부럽다!
그런데 육로야 그렇다 치고, 영국이랑 프랑스 사이에는 바다인데 어떻게 기차가 다닐까?
지하 해저터널이 놓여있대.
채널 터널이라고도 불리는데,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가까운 도버해협을 연결하는 터널인데, 총길이가 50.45km, 그중 해저구간은 38km쯤이래. 가까운 거리인가? 어쨌든 저 길이라도 바다밑에 해저터널이라니, 대단해. 우리나라는 일본이랑 해저터널을 놓으려면 200km 정도는 놓아야 한대. 힘들겠지? ㅎㅎㅎ 기차 타고 해외 가는 건 통일이나 되어야 가능한 이야기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