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코츠월드 투어를 무사히 마치고, 라면까지 야무지게 끓여 먹고 뒷정리도 다 하고 배를 통통 두들기며 다들 침대에 누워서 휴식을 즐겼습니다.
다음날 일정은 <해리포터스튜디오>와 <오페라의 유령>이고, 그다음 날은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이제 자유시간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아들이 아직도 사지 못한 레고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레고, 레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저녁에 할 것도 없고, 어디 다 같이 가기도 피곤하니 아들을 데리고 레고스토어에 한 번 더 가기로 했습니다. 딸에게 같이 가자고 하니 싫다고 하여 호텔에 혼자 잠깐 쉬게 하고 빨리 갔다 오기로 했습니다. 조건은 '쟤는 원하는 <레고스토어>에 가는 대신, 나는 그동안 <유튜브>를 보겠다'는 것.
(자, 독자 여러분. 지금부터 엄마인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한번 살펴주시옵소서)
호텔 앞에서 버스를 타고 레스터스퀘어의 차이나타운을 지나 레고스토어로 갔습니다. 갔습니다. 갔는데, 이게 뭔가요. 문이 닫혀있네요?
세상에! 레고스토어는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영업을 하는데, 일요일만 오후 6시에 영업이 끝나더라고요. 그날은 일요일이었고요. 왜! 하필, 오늘은 일요일인가요!!
아들은 웁니다. 진짜 웁니다.
문 닫긴 레고스토어 앞에서 "내 포르셰 911..." 하며 정말 웁니다.
그리고 영업시간을 왜 체크를 안 했냐면서, 다 엄마 때문이라면서, 엄마가 다시 오면 된다고 해서 그때도 그냥 나갔었는데, 이제는 다시 오지도 못하는데 엄마 때문에 레고도 못 사고 영국을 떠나게 됐다면서 징징 웁니다.
너무 대한민국 사고방식으로 생각했나요? 일요일 저녁에 쇼핑몰 문이 일찍 닫힐 줄이야 상상도 못 했는데요. 그래서 확인도 안 하고 그냥 왔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쨌든 문 닫은 레고스토어를 다시 문 열게 할 방법도 없고, 날도 점점 어두워지고 딱히 별다른 방법도 없으니 시무룩해진 아들을 달래고 달래서 호텔까지 다시 왔습니다.
호텔에 들어와서 아들이 말합니다.
"엄마, 나 레고도 못 사고 구경도 못 했으니까, 대신 유튜브 좀 보여주면 안 돼?"
"어. 알겠어. 엄마 폰으로 좀 봐."
이 말을 들은 딸이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보여주지 마. 야! 너는 유튜브 보면 안 돼."
제가 사정을 설명합니다.
"OO아, 얘 레고 사러 레고스토어 갔는데 문도 닫혀서 구경도 못 하고 울다가 왔어. 그냥 유튜브 좀 보여줄게."
딸이 급발진합니다.
"안 돼! 안 된다고!!! 쟤는 유튜브 보면 안 되는 거야. 왜 보여줘? 레고까지 사러 가놓고, 거기서 문이 닫혀있든 말든 그건 내가 알바 아니고! 쟤는 이미 갔잖아! 레고 사러 간 거 아니야? 거기까지 갔다 왔잖아!! 그런데 쟤한테 왜 또 유튜브 보여주냐고! 원래 나는 여기서 유튜브 보고, 쟤는 레고 사러 간 거 아니야? 그럼 그렇게만 하고 끝내야지, 쟤한테 유튜브를 왜 또 보여주냐고!!!!!!!!!!!!!!!!!!"
이게 이렇게 화낼 일인가요?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도 안 가는데, 저렇게 소리까지 바득바득 질러가며 동생한테 유튜브를 보여주지 말라고 하니 진짜로 어이가 없습니다. 동생이 유튜브를 보는 것이 그렇게 싫은가? 자기도 같이 가고 싶었나?
진짜 마음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저도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었던 터라, 분노를 참고 억지로 말했습니다.
"아. 그래. 그럼 쟤 볼 동안 너도 너 폰 보게 해줄 테니까 같이 봐. 각자보면 되잖아."
"싫! 어! 싫! 다! 고오!!!!!!!!! 나도 안 볼 테니까!!! 쟤도 보여주지말라고오!!!!!!!!!!!"
이건 무슨 똥고집입니까. 자기 것도 필요 없으니 동생한테 유튜브를 보여주지 말라니.
그 놀부 심보와 싹퉁머리 없는 말투에 저도 꼭지가 돌았습니다.
"야! 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둘이 같이 보면 되잖아!"
"아니!!!!!! 쟤가 레고스토어에 갔고! 그 대신에 나는 유튜브를 볼 수 있었던 거라고!!!! 쟤는 그럼 레고스토어도 가고 유튜브도 보고 두 개나 하는 거잖아!!!!!!!!!!!!!!!!!!!!!!!!!!!!!"
아. 그놈의 유튜브 진짜.
다 없애버리든지 해야지.
애초에 폰을 들고 온 자체부터가 잘못됐다 생각했습니다.
아닌데? 그러면 아이들 잃어버려도 찾을 방법이 없는데?
그럼 여행까지 왔는데 유튜브고 게임이고 뭐고 다 안된다고 했어야 했나?
숙제도 없고 학원도 없는데?? 폰 좀 보여주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쟤는 "그래! 좋아!"하고 동생이랑 같이 보면 자기도 좋을 텐데, 뭐 때문에 저렇게 싫다고 하는 거지?
애가 왜 저렇게 고집이 센 거야?
소리는 또 왜 바락바락 지르고 난리야!?
짧은 순간, 후회와 분노가 자동차 피스톤처럼 번갈아 올라왔다 내려왔다 하더니 인내심은 폭발하고, 저도 같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야!!! 너는 애가 마음을 왜 그 따위로 쓰냐? 어! 너도 보고 쟤도 보고 하면 되잖아!!!!!! 너도 보고! 얘도 보고!! 둘 다 보라고!!!!!!!!!!!!!!!!!!!!!!! "
그리고 그 뒤로 밤늦게까지, 딸과 저는 서로 고성을 내며 싸웠습니다.
급기야 저는 "야, 너도 휴대폰 하지 마. 내놔."하고 딸아이의 휴대폰을 뺏으려고 시도했고, 딸은 생명줄과도 같은 휴대폰을 뺏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저는 악착같이 뺏으려고 했고요. 그래서 육탄전이 벌어졌죠. 이제 뭐. 눈에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부모의 권위나 어른으로서의 지도력 같은 것은 완전히 내팽개치고, 저도 그냥 개싸움에 들어갑니다. 이 새끼 저 새끼 소새끼 말새끼 하면서 진짜 동물농장이 되었습니다. 딸과 엄마가 제대로 붙어버린 1:1 맞다이, 심판 없는 규칙파괴 UFC가 펼쳐집니다. 한참 소리를 지르면서 몸싸움을 하다 보니 땀이 뻘뻘 납니다. 혹시 우리가 지른 고성이나 딸아이가 우는 소리 때문에 호텔에서 아동학대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눈에 뵈는 거 없이 싸웠습니다.
한참을 실랑이하다가 딸이 지쳤는지 "아아아악!!!! 몰라!!! 나 잘 거야!! 짜증 나!!!!!!" 하면서 휴대폰을 내던지고 이불을 얼굴까지 덮고 자버립니다. 다시 적군에게 달려들어 무릎을 꿇리고 백기를 입에 물게 하여 항복을 시키고 싶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싶어서 저도 포기합니다.
그러고서는 남편, 엄마, 친구 등등 저희 딸과의 평소 난장판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타국에서의 전쟁 발발 소식을 전합니다. "어휴! 저걸 어쩔 거야, 진짜!!" 하며 저도 불을 끄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지만 내일 아침은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대책 없이 그냥 잡니다.
다음날.
해리포터 스튜디오는 10시 30분 입장이 예약되어 있고, 가는데 2시간 정도는 넉넉히 잡아야 해서 8시 30분에는 나가야 합니다. 씻고 조식도 먹고 가려면 더 일찍 일어나야겠죠. 아들은 아무 소리 없이 일어나 씻고 옷을 입습니다. 어느 집이나 둘째는 눈치로 먹고 사니까요. 딸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자고 있는데, 일어나라고 깨우니 딸이 소리칩니다.
"아!!! 왜!!!! 깨우지 마!!!!!"
"너 오늘 해리포터 스튜디오 가는 거 알잖아. 우리 기차 타고 가려면 일찍 나가야 되니까 일어나."
"나 안가."
"뭐?"
"안 간다고. 지금 가게 생겼어?"
"무슨 소리야?"
"말 시키지 마. 말했잖아. 안. 간. 다. 고."
와. 겨우 닫혔던 뚜껑이 또 열리기 시작합니다. 어떡하죠?
애기도 아니고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고, 대체 왜 화가 났는지 이해도 못하겠는데 저러고 뻗대고 있으니 돌겠습니다. 시간은 지나가고요.
결국 그럼 조식 먹고 올 테니까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고 아들과 조식을 먹으러 내려갑니다.
분위기는 침울합니다.
"엄마. 누나 성격에 진짜 안 갈 거 같은데. 어떡하지?"
"그러게 말이야. 혼자 놔두고 갈 수도 없고. 안 갈 수도 없고."
"누나는 절대 안 갈 거야. 그렇다고 우리까지 안 갈 수는 없잖아. 돈도 아까운데."
왜 하필 해리포터스튜디오를 예약해 놓은 오늘 이런 일이 터졌을까요?
어젯밤에 저는 뭘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요?
그냥 끝까지 참고 딸한테 다 맞춰줬어야 하는 걸까요?
조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바로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들과 저의 예상에 딱 맞게 딸은 여전히 잠옷을 입고 자고 있었고 말도 못 붙이게 했습니다. 해리포터 스튜디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고, 예약도 되어있고, 티켓값이 비싸니 날려먹을 수도 없고 (참고로 1인당 10만원 정도입니다...), 숙소에서도 좀 떨어진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당장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시간이었습니다. 이럴 때 사춘기는 잃을 것이 없으므로 마음 급한 사람은 엄마뿐입니다. 벼랑 끝에 있으니 전술이랄 것도 없죠. 그냥 싹싹 비는 수밖에. 진짜 부글부글 하지만 마음을 바꿔먹고 심호흡을 하고, 딸을 달래기로 했습니다.
"OO아. 일단 해리포터는 가기로 했으니까, 그건 가고. 가면서 이야기하자. 어제 엄마도 흥분하고 화내서 미안해. 일어나서 준비하고 가자."
"......."
"OO아."
"아아앙아ㅏ악!!! 안 간다고 했잖아!! 안! 간! 다! 고! 제발 말 좀 걸지 마!!!!! 둘이서 갔다 와 그냥!!!!"
앗. 뜨거.
어후. 이거 뭐 데리고 갈 상태가 아니네요.
아들도 옆에서 눈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가까운 곳이면 금방 왔다가 가겠는데, 적어도 서너 시간은 걸리는 곳까지 갔다가 오려니 놔두고 가기가 너무 걱정되고요.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벌렁벌렁)
이래저래 고민하다가 딸 성격상 갑자기 일어나서 간다고 할 리가 만무하므로, 그냥 아들이랑 빨리 갔다 오기로 합니다.
"진짜 간다, 엄마 나간다. 갔다 올게. 유스턴 역이라고 있으니까 늦게라도 오고 싶으면 버스 타고 와. 전화해."
"내가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 그냥 가!!!"
앙칼지게 소리를 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아들과 호텔을 나와 유스턴 역으로 향합니다. 둘 다 가는 길에 말을 잃었습니다.
진짜 가도 되는 건가,
이거 누가 신고하면 아동학대로 잡혀가는 건가,
호텔에 갑자기 불이라도 나면 어떡하지.
오만 가지 걱정이 다 머리와 마음을 휘저어 놓습니다.
점점 멀어져 간다...
아들도 저도 해리포터스튜디오로 가는 기차 안에서도 말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여행일까요? 고문일까요?
돈이라는 것은 잔인합니다. 해리포터스튜디오를 예약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비싼 돈을 주고 미리 표를 끊어놓지 않았다면, 어디에 언제까지 가야 된다는 압박만 없었으면 더 찬찬히 이야기도 하고 마음도 풀어보고 할 텐데요. 가는 기차 안에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나는 뭘 잘못해서 이렇게 고집 센 아이를 자식으로 맞이했는지 생각하며 한숨을 푹푹 쉽니다. 기차의 바깥 풍경이 런던과도 다르고, 옥스퍼드 갈 때의 시골풍경이랑도 또 다른 교외의 모습이 펼쳐지는데 신기하기도, 사진을 찍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름대로 런던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잡아놓은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이렇게 반쪽으로 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가슴에 돌덩이만 그득합니다. 아이고, 두야.
도착했는데 우울함.
도착했습니다. 네. 도착했습니다.
갑니다. 네. 가요.
봅니다. 네. 봐요.
이렇게 재미없을 수가!!!!!!!!!
해리포터 스튜디오 너무 재미없어요!!!!!!!!!!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정도 예약도 비용도 아니고 <마음>이에요!!!
즐거운 마음이 있어야 재미있는 곳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아들과 세상 짧고 우울한 해리포터 스튜디오 체험을 마치고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갑니다. 해리포터 스튜디오에서 저희보다 빨리 나간 사람은 없을거예요. (혹시 해리포터 스튜디오 후기를 찾아오셨다면 다른 분 찾아가셔요. 저희는 제대로 본 것이 엄써요. ㅜㅜ) 눈으로 봤는지 코로 봤는지 알 수도 없이 몸은 여기있지만 마음은 호텔에 있고, 휴대폰만 하루종일 쳐다보고 걱정만 하다 갑니다. 폰으로 위치 확인을 하면서 딸에게 중간중간계속 전화를 걸었는데 계속 거부하면서, 휴대폰 열어달라고 문자는 오는 걸 보니 살아는 있는 거 같아요. 그것도 안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