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30분인 집결시간에 맞추어 새벽에 일어나서 (우리가 먹는 하루 음식 중 가장 맛있었던) 조식도 못 먹고 어두컴컴한 거리로 나서 지하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해머스미스역에 내리자 손흥민 선수가 저희를 반겨주어 국뽕이 차올랐습니다.
약속 장소인 맥도널드 앞으로 가니 오늘의 투어멤버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부터 재잘거리며 깔깔대고 있는 20대 여대생 3명이 모여있었고, 또 20대로 추정되는 남자 1명이 있었습니다. 미팅 시간이 조금 지나 화장부터 헤어, 의상까지 과하게 꾸민듯한 20대 여성이 다급히 나타나더니 그 남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습니다.
"OO님, 맞으시죠?"
하며 서로 통성명을 하였습니다.
오? 이것이 바로 유럽여행카페에서 매번 보던 '동행'의 모습이었습니다.
"OO일 XX투어 동행 구해요"
"OO일 파리 디즈니랜드 동행 구해요"
"OO일 저녁 런던 선데이로스트 먹고 타워브리지에서 사진 찍을 분 동행 구해요"
하던 '동행 구해요'하는 글들의 실제 인물들을 만난 것입니다.
저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린 건지, 아님 저러고 다녔을 때의 기억을 다 잃어버린 것인지 저런 글들을 보면
'어머, 어머! 얘들은 겁도 없나 봐! 이상한 사람 만나거나 범죄에 휘말리면 어쩌려고 알지도 못하는 동행을 여기서 구하는 거야!'하며 '아이고 철도 없다'라는 식의 생각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니 혼자 온 여행에서 이런 투어는 어차피 가이드와 함께 다니니 안전하기도 하고, 같이 다니면서 이야기도 하고 밥도 먹고 사진도 찍어주면 뭐, 나쁠 것도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허나 그 두 명은 남자와 여자 모두, 아주 멋지거나 아주 골져스 하지는 않아서 서로가 만족할 상대가 될는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만났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와 하루종일 같이 다녀야 한다면? 그것 또한 여행을 망치는 일이기 때문에, 어쨌든 동행 구하기는 신중해야 합니다. ㅋㅋ
나도 20대에 혼자 유럽으로 여행을 왔다면, 멋모르는 남자와 동행해서 저렇게 다녔을까? 다닐 수 있었을까? 하는 회귀 망상을 해보았지만,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니 쓸데없는 생각을 바로 접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기회조차 없다는 것이... 살짝 아쉽기도 했... 허허허
지금 혼여하며 동행을 구한다면 그 자체로 사연 있는 글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40초 여자, 옥스퍼드 동행 구해요. 가정도 있고 애들도 있는데 혼여 왔어요. 이혼은 안 했고요. 서로 사진 찍어주고 점심 맛있는 거 같이 먹고 쿨하게 헤어지실 분 구합니다. 남녀 상관없어요."
정상으로 보이나요? ㅋㅋ 연락 오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런 글을 올리는 사람도, 연락하는 사람도 아주 이상하거나 진짜 미친 듯 외롭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저도 혹 달고 다니는 여행에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지쳤나 봅니다. ㅋㅋ
여하튼, 20대 청춘들을 살짝 부러워하며 가이드님의 차로 탑승합니다.
코츠월드부터 먼저 갑니다. 히터가 나오는 따땃한 차 안에서, 커피도 못 마셔 정신이 몽롱몽롱 합니다. 제일 앞자리에 앉은 저희 두 아이들은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고 20대 여대생들은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대고 있고 동행남녀는 젤 뒷자리에 껴서 동태를 알 수 없습니다.
차 안에서 가이드님은 계속 설명을 하십니다. 이때까지의 투어는 이어폰을 끼고 하는 워킹투어라 집중해서 듣지 않아도, 대답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여기는 차 안에 갇혀있고,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니 조수석 바로 뒤에 앉은 저라도 열심히 듣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사들의 직업병이 있는데요, 어디선가 말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뻘쭘하게 되는 상황이 되지 않도록 '나라도' 최선을 다해서 듣고, 활발히 리액션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설명하는데 내 말을 안 들어줄 때의 그 슬픔 또는 자괴감의 느낌을 알기 때문에 쉽게 외면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선생님들이 패키지여행을 가면 그렇게 힘들다고 합니다. 가이드의 말에 잘 들어주고 대답하다 보면 어느새 가이드와의 1:1 투어가 되어버려 패키지여행 내내 수업 들으며 다녀야 된다는 것이죠.
지금, 제가 그렇게 되어버렸네요? 그 차에서 대답하는 사람은 저뿐이었습니다. 다들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거나 자고 있어서 제가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이드님은 저에게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역사, 문화, 왕실, 날씨 같은 이야기들이 흥미롭긴 했지만 차창 옆으로 펼쳐지는 한적한 교외의 초록색 풍경을 조용히 감상하고 싶었는데 가이드님의 질문에 집중해서 대답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졸리기도 했고요.
영국 집중 강의를 (혼자서) 듣다 보니 어느새 코츠월드의 '바이버리'라는 마을에 다다랐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꼽히기도 하는 이 마을은 600년 전 중세 영국 가옥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아침 일찍 시간이라 안 그래도 조용한 마을은 관광객도, 현지인도 없는 고요한 마을이었습니다. 사진에서만 보던 동화 같은 집들이 펼쳐진 고즈넉한 마을을 걸어서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영국 사람들이 은퇴하고 가장 오고 싶은 마을로 꼽는다던데, 조용하고 깨끗한 환경을 보니 그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도, 병원도 마트도 극장도 없는데 심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촌처럼 내 집 앞에 끊임없이 관광객이 오가는데 그것도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남의 나라 은퇴자 걱정은 안 하기로 하고 잡생각을 접었습니다.
산책길 끝에 있는 기념품과 식료품과 기념품을 잡종의 가게는 비현실적인 풍경의 배경 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안에서 구경을 하고 나오려는데 연어 킬러인 딸이, 거기에서 파는 생연어를 사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파는 연어는 진짜 바로 잡아 파는 거니 더 싱싱하고 맛있을 거 같다며, 저 연어를 사주면 샌드위치처럼 잡고 북극곰처럼 뜯어먹겠다며 계속 연어를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이 수많은 기념품과 초콜릿 같은 것을 놔두고 컷팅도 안 되어있는 생연어라니.. 고집탱이 사춘기를 겨우 뜯어말려 나오는데 엄마 때문에 맛있는 생연어를 먹을 기회를 놓쳤다며 입을 삐쭉합니다.
다시 차를 타고, '버튼 온 더 워터'라는 마을로 갑니다. 영국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입니다. 마을 중간으로 얕은 강이 흐르고, 여러 개의 돌다리가 놓여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베네치아 같지는 않지만 바이버리 마을에 이이서 여기도 영국에서만 볼 수 있는 분위기의 마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각자 1시간 정도 구경한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뿔뿔이 헤어집니다.
가이드님이 강추하신 스콘 가게로 갔습니다. 동화 같은 가게와 예쁘게 전시된 스콘들이 저희에게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오구오구, 이때까지 맛없는 것만 먹었쪄? 불쌍하기도 해라! 우리 스콘 먹어봐! 크림티랑 같이!!"라고 말이죠. 아이들이 없었으면 스콘 하나와 크림티 하나로 한 끼를 보내며 이 마을과 귀여운 가게의 분위기를 맘껏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또 아쉬움이 밀려왔습니다. 아이들은 스콘이라 해봤자 그냥 좀 딱딱한 빵일 뿐이고 커피나 홍차의 맛도 알 리가 없으니 그냥 빨리 사고 나가자고 성화였습니다. 대충 스콘 몇 개를 사고 나왔습니다. 강가의 벤치에 앉아서 스콘을 먹는데 저는 계속 크림티나 커피 생각이 납니다. 아들은 스콘은 별 맛이 없다며 새를 쫓으러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닙니다.
점심은 가이드님이 강추하신 '치킨 바이트'를 먹기로 했습니다.
추천해 주신 몇몇의 맛집 중에 아이들의 입맛에 맞는 것은 치킨바이트 뿐이었으니까요. 치킨 바이트도 맛없다면 이것은 정말 맛의 종말 아닙니까? 치킨 바이트는 당연히 맛있었지만 스콘에 치킨 바이트에 사이드로 시킨 감자튀김까지 뱃속으로 들어가니 느끼함이 폭발해서 양념치킨소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라면 생각도 계속 나고요. 어쨌든 가이드님 덕분에 이 마을에서는 맛 테러를 당하지는 않았으니 만족하며 점심 식사를 마무리했습니다.
마을 곳곳에 있는 기념품, 캔디, 스웨터 가게들을 재빨리 구경하고 다시 약속장소로 모였습니다. 동행남녀는 스콘 집에서도, 치킨너겟 집에서도 만났는데 서로 친해졌는지 강가에서 서로 계속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고, 절친 여대생 3명은 스콘을 한국까지 가져가려고 하는지 스콘을 한 사람에 한 박스씩 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아줌마의 오지랖인가요! 저걸 우째 들고 갈라꼬! ㅎㅎ
다시, 차를 타고. 옥스퍼드로 이동합니다.
가는 길에 옥스퍼드 대학교의 역사와 대학 순위, 출신 인물들에 대해 또 과외를 받았습니다. 여러 정치인들과 작가, 학자들을 거쳐 엠마왓슨과 휴그랜트까지 이야기가 이어지자 우리나라의 대학들이 한없이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초라한 대학조차 쉽게 못 가는 우리나라 현실도 초라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그냥 '옥스퍼드 대학교'를 가보고 "이런 대학도 있다니! 나도 이런 대학 다니고 싶어!"라는 헛되지만 아주 작은 소망을 품기를 살짝 희망했는데, 가이드님의 소개를 들으면 들을수록 꿈조차 꿀 수 없는 대학이 될 뿐이었습니다. '아, 나는 안 되겠네.'라는. 똑똑한 저희 아이들도 바로 느꼈겠죠? ㅎㅎ
옥스퍼드에 내렸습니다. 시 전체가 대학 캠퍼스라고 해도 될 만큼 대학 건물들로 도시가 이루어져 있었고, 조금은 어두운 고딕양식들의 건물들로 런던과도, 오전에 갔었던 코츠월드와도 또 다른 분위기가 풍겼습니다. 이런 유서 깊은 좋은 대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대학생활도 하고 연구도 하다니! 가방을 메고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 다니는 학생들이 모두가 귀족 엘리트로 보이고, 또 부럽습니다. 아마 차 안에서 들은 옥스퍼드 대학의 설명 때문에 후광 필터가 너무 많이 적용된 것 같기도 하고요.
옥스퍼드 전경 / 출처 : 나무위키
옥스퍼드 대학의 학위수여식이나 중요한 행사들이 열린다는 <셀도니언 극장>부터 시작했습니다. 세인트 폴 성당을 설계한 '크리스토퍼 렌'이 설계했다는 것을 들으니 저 꼭대기에 있는 돔이 세인트 폴 성당이랑 형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극장 옆에 있는 땅에 새겨진 번개표시를 기념 삼아 사진도 찍었습니다. 방위를 나타내기 위한 표식이라고 하는데요. 해리포터의 이마에 새겨진 번개표시가 이것을 본떠서 만든 것이라는 설도 있다고 하는데요.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럴듯하네요.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보들리안 도서관>의 입구만 봅니다. 서가의 길이가 190km 나 된다는 이 도서관은 영국에서 출간되는 모든 책의 초판본을 보관하도록 되어 있어서 책을 보관하기 위한 필요한 장서공간이 계속 늘어난다고 합니다. 가히 '없는 책이 없는' 도서관이라고 할만하네요. 호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이 실사화된다면 여기에서 찍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스쳐갑니다. 도서관의 내부 투어는 미리 신청해야만 할 수 있어서 입구에서 사진만 찍고 갑니다. 얼마나 좋나요! 도서관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저희 아이들은 "도서관을 돈 내고 왜 보냐"는 소리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아예 못 들어간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그리고 대망의 <레드클리프 카메라>입니다. 보들리언 도서관의 건물로 의사이자 학자인 '레드클리프'는 기부한 사람의 이름을, '카메라'는 방(room)을 뜻한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옥스퍼드 학생들만 출입할 수 있어서 여기 들어가려면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을 해야 한답니다. 투어 인원 중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은 저희 아이 둘 밖에 없으므로 "어때? 여기 입학해서 이 도서관 안에 들어가 보고 싶지?" 하며 가이드님이 친절하게 농담을 건네십니다. 이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건만, 저희 아이들은 그 말에 수줍게 쌩깝니다. 저도 옆에서 "하하하하, 얘들은 뭐.. 하하하하하..." 하며 대충 무마하려 애썼지만, 분위기 수습이 어렵네요. ㅜㅜ
어쨌거나 여기에서도 이어폰 없이 육성으로 이어지는 가이드님의 설명에 집중하는 것은 저 혼자 뿐입니다. 어느새 청춘들은 다들 제각각 놀고 있으며, 저희 아이들은 옥스퍼드의 스몸비가 되어 좀비처럼 끌려다니고, 가이드와 저만 1:1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역사 지식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겁나 유익한 시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옥스퍼드에 올 일도 없는데 말이죠.
교수실에서 성적을 듣고 탄식을 하며 지나가게 되어 <탄식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다리를 지나, 해리포터가 촬영되었던 <뉴컬리지>의 말포이나무 앞에서 해리포터 장면도 따라 하며 사진도 찍었습니다. 그나마 해리포터를 보고 와서 영화에 나온 곳들은 기억하고 있어 아주 쬐끔 신기해했다는 것이 다행이긴 했네요.
해리포터 식당씬을 촬영했다는 학생식당 <그레이트 홀>은 옥스퍼드에서 저희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곳이었습니다. 좀 멋지긴 했어요. 영화 장면도 생각나고 곳곳에 걸려있는 초상화도 신기하게 예뻤고요. 지금도 실제로 학생식당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하던데 그날도 무슨 행사가 있는지 만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 옥스퍼드 학생 신분으로 이런 곳에서 식사하면 자동으로 어깨뽕이 들어가고, 정말 뭘 먹어도 맛있겠다 싶었습니다. 밥 먹으면서 '나도 초상화로서 벽에 붙어보고 싶다' 이런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마지막 아주 멋진 정원에서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있었는데, 저희 아이들은 그 그림 같은 곳에 놓인 벤치에 누구보다 빨리 뛰어가서 둘 다 휴대폰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 이런 멋진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
'나도 옥스퍼드 대학생이 되고 싶다'
이런 생각은 1도 안 하는 게 당연한가요?
하긴 서울대로 소풍 간다고 서울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니지만 저 놈들의 저 행태가 못내 아쉽고 눈에 거슬립니다. 하지만 참았죠. 왜냐면 가이드님이 애들 데리고 오면 백이면 백, 저 벤치에서 다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저에게 위로를 해주셨거든요. 저희 집만 그런 거 아니라니 조금 덜 부끄럽고, 됐습니다. 뭐. 하하.
그리고는 잠시 있던 쉬는 시간에 추천해 주신 <커버드 마켓>으로 갔습니다. 이쁜 초콜릿 가게, 베이커리, 꽃집, 양말집, 소품가게 등 들어갈 곳들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는데, 저희 딸이 중국 글씨를 발견하더니 마라탕을 사달라고 난리를 칩니다. 여기 와서 무슨 마라탕이냐, 호텔 가서 라면 먹어라 하니 절대 싫답니다. 무조건 이 집에서 마라탕을 사 먹겠다고 합니다. 마라탕 안 먹은 지 일주일도 더 지난 거 같아서 먹고 싶어 미치겠답니다. 하.
결국은 사줬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자유시간에 구경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마라탕이라니. 옥스퍼드에서 틈만 있으면 휴대폰만 들여다보다가 결국에 먹는 게 마라탕이라니. 저는 마라탕을 좋아하지 않는지라 시키지는 않고 마라탕을 흡입하는 딸 옆에 앉아있는데 기분이 안 좋습니다. 표시를 안 내려고 해도 저도 이제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맘 같아서는 "야! 하루종일 휴대폰 하려고 왔냐?? 어!!"라는 말을 퍼붓고 뒤통수를 시게 한방 갈기고 싶습니다.
그래도 또 참아야겠죠? 이제 집에 가기만 하면 되는데, 여기서 화내서 망치면 안 되니까 참을 인자 세 개를 그리며 억지로 참아봅니다. 가는 길에 초콜릿 가게에 가서 작은 선물이라도 살까 했지만, 빨리 가자고 딸이 성화입니다. 결국 구경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 사고, 모든 굿즈에 옥스퍼드가 잔뜩 새겨진 굿즈는 만져보지도 못하고 또! 또! 아쉬움만 잔뜩 가진채 집합 장소로 갑니다.
가는 길에는 어둡기도 하고 다들 지쳐서 잡니다. 저는 안 자고 싶었지만 마라탕이랑 휴대폰 때문에 화도 나고 기분도 안 좋아서 잠깐 창문에 기대고 있었는데 저도 잠들었습니다. 가이드님은 저 없이 누구와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잠시 깼을 때 걱정이 되었지만, 다시 말 걸까 봐 모른 척하고 잤습니다. 영국 역사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 누가 누군지도 모를 지경이었어요.
다시 해머스미스 역에 도착해서 해산합니다.
편하게 갔다 와서 좋았지만, 그리고 런던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을 보고 즐길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지만, 아무 생각 없는 아이들을 세계 1,2위를 다투는 명문대로 끌고 온 것이 잘한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드는 마무리였습니다. 아이들의 기억 속에는 옥스퍼드는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해리포터로 남을까, 마라탕으로 남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지만 제 생각에는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가 정답일 것 같습니다.
저는 영국 여행을 하면 할수록 '조앤 K. 롤링'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고요. 옥스퍼드야 원래 유명했겠지만, '해리포터에 나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이 보러 오고, 사진을 찍고, 재미있어하는 것들을 보니 해리포터 세계관이 만들어 낸 문화적 자산이 엄청나다는 것을 느꼈고요. 그런 소설과 세계관이 존재하는 영국이 또 부러웠습니다.
하지만 느끼한 속을 달래려면 빨리 호텔로 가서 라면을 먹어줘야겠어요. 영국에는 해리포터 있냐, 한국에는 라면 있다!! 오늘의 라면은 '라볶이'로 정했습니다. 마라탕은 라볶이로 중화하겠습니다.
라면을 먹고 이 셋은 단잠에 푹 빠졌을까요?
아니면 1분 1초도 아까워하는 엄마에 의해서 저녁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끌려나갔을까요?
다음 편에 대환장 파티가 펼쳐집니다. 기대하소서..... ㅋㅋ
사춘기들과 장기여행을 하다 보면 꼭 감정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절친끼리 여행 가도 싸우기 마련인데, 자기들 밖에 생각 안 하는 사춘기들과 함께 하다 보면 아무리 잘 다니려고 해도 기분 안 좋아지는 순간은 당연히 있죠. 어떡해야 할까요?
1. 거리두기
일단 말을 섞지 마세요. 말만 나갑니까? 아이들은 부모의 말보다는 태도에서 더 많은 것을 느낀다고 하죠. 말은 "그래, 알겠다" 해도 못 마땅하고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누구보다도 빨리 느끼게 되겠죠. 그리고 자기들도 말 안 하거나 투덜대거나 엇박자를 내겠죠. 자기들도 화났다 이겁니다. 근데 문제는 집에서야 각자 방에 들어가든가, 어른들도 밖으로 좀 나갔다가 오든가 하면 되는데 여행에서는 24시간 한 방 쓰며 같이 있어야 되니 어디 피할 곳도 없고 서로 난감합니다. 서로 꼴 보기 싫은데 말이죠. 그래서 그냥 감정이 좀 가라앉을 때까지, "이야기 좀 하자, 너 여기 좀 앉아봐라"며 자꾸 치근대며 말 섞지 마시고 사진이나 여비 정리나 하시면서 조용히 묵언수행을 하시길 바랍니다. 기억하세요! 첫째도 '평화', 둘째도 '평화'입니다!!
2. 휴대폰 쥐어주기
좀 부글부글 하는 일이긴 하지만, 서로의 평화를 위해서 휴대폰 타임도 즐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행도 한 3일까지는 엄청 설레고 즐거운데, 여행 중반쯤 되면 몸도 피곤하고 이제 바깥 풍경이 엄청 이국적이지도 않고 그렇지 않습니까? "여행 왔으니 엄마가 시원하게 시켜준다, 대신 OO은 하는 걸로 약속하자"하고 쿨하게 시켜주시고 그 시간 동안 부모님도 좀 쉬세요. 저녁에 시켜줘도 낮 일정이 빡빡하면 길게도 못하고 그냥 조금 하다가 잠들어 버리기는 하더라고요.
3. 혼자라도 나가기
이거 중요합니다. 호텔 로비에 있는 카페나 호텔 가까운 곳에 있는 마트라도, 혼자만의 산책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아이들도 힘들겠지만 솔직히 자기들이야 따라다니기만 하지, 부모만큼 힘들겠습니까? 특히, 저처럼 진짜 보호자 1명이 아이들 데리고 다니신 경우라면 혼자만의 시간 진짜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린아이들이 아니라면, 단 30분이라도 아이들 안전한 곳에 있으라고 하시고 혼자만의 여행타임 가지시길 꼭! 권합니다. 그 잠깐의 힐링타임이 다음 여행의 에너지가 되기도 하니까요. '지금 이 순간'을 '혼자라도' 꼭, 즐기시길 바랍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학생 아니면 못 들어간다며? ㅋㅋ 그래서 이번 생에는 못 볼 것 같아 엄마가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