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벤트가든에서 앞으로는 돈을 주고 음식을 사 먹지 않기로 결의(?) 한 후, 저희의 다음 방문지는 타워브리지였습니다.
조금 걸어서 내려가면 나오는 부두(Pier)에서 페리를 타고 갑니다. 한강에는 유람선이 있긴하지만, 대중적인 교통수단의 통로 역할은 잘하지 못하는데, 런던은 곳곳에 부두가 있고 페리가 버스처럼 다녀서 이동할 때 쉽게 이동할 수 있으니 색다른 체험입니다. 템즈강을 지나가는 동안 세인트폴 성당도 보이고, 워키토키라는 별명을 가진 펜처치빌딩도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풍경들은 저만 보고 있습니다. 전일의 강행군에다가 오전의 워킹투어까지 더해져서 아이들은 이미 넉다운입니다. 그냥 창가에 기대서 잡니다. 그래서 약간 좋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혼자 여행 온 기분.....
런던 브리지 시티 피어에 도착해서 내립니다. 저 멀리 타워브리지가 보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예쁜 다리를 꼽아보라 하면, 저는 주저 없이 타워브리지를 1순위로 올리겠습니다. 런던의 여러 랜드마크들이 있지만 타워브리지는 런던에 씌여진 가장 화려한 티아라 같습니다. 런던의 파란 하늘색과 다리 옆의 런던탑과 분명히 깔맞춤 했을 다리를 보고서는 "예쁘다!"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떻게 성 같은 다리를 지을 수가 있죠? 중앙에 왕관을 올릴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요.
아들도 딸도 처음 보는 형태의, 그것도 아주 예쁘고고풍스러운 다리를 보고 감탄합니다. 사진을 멋지게 몇 장 찍고서는 오기 전에 둘이 함께 계획한 일을 합니다. 그것은 에펠탑이나 타워브리지 같은 랜드마크들을 가방에 담는 척하는 착시(?) 사진을 찍는 것이죠. 아들이 메고 있던 가방에 물건을 길바닥에 다 털더니 타워브리지를 가방에 담는 척해봅니다. 깔깔대고 웃다가 사진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자 돌아버렸는지 그냥 가방을 머리에 덮어쓰고 이상한 장난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서로 기분이 상했는지 또 치고 박고 싸웁니다. 당연한 수순이죠.
한참을 하염없이 타워브리지의 자태만 보고 있었습니다. 3시 정도밖에 안 됐는데 해는 스멀스멀 넘어가서 좀 전까지 햇빛이 반짝이던 공간 전체가 음지로 바뀌어 으스스하고, 나무데크 바닥은 꽁꽁 얼어있어 스케이트 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온순해진 딸과 팔짱을 끼고두런두런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아들이 없습니다. 주변을 살펴봐도 없습니다. '영국 아들'한테 전화를 수십 통 해봐도 전화도 안 받습니다.
우리 아들 어디갔노?ㅠㅠ
얘가 누구를 따라갔나, 무슨 일이 있나, 전화가 계속 연결이 안 되면 아이를 어떻게 찾지, 온갖 걱정이 훅 올라옵니다. 새파래진 얼굴로, 손으로는 계속 전화를 하고 눈으로는 아이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딸에게도 동생이 없어졌으니 찾으라고 하고 둘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아이를 찾습니다.
수십 번 전화를 하는 도중에 겨우 전화가 연결됩니다.
"OO아, 왜 전화를 안 받아? 어디 갔었어? 지금 어디야?"
"어. 나 비둘기 앞이야."
"뭐라고?"
주변을 둘러보니 비둘기가 족히 수십 마리는 있습니다. 비둘기 앞이라니, 얼탱이 없는 설명에 기가 막힙니다. 똑바로 설명하지 않는 아들을 족쳐 그 비둘기는 대체무슨비둘기냐는 닥달에 "푸드트럭 앞에 있는 비둘기다"라는 대답을 합니다.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푸드트럭 앞으로 가서 아들과 상봉했습니다. 왜 탈주했냐 물으니, 엄마가 누나랑만 이야기해서 기분이 나빠져서 혼자 갔다고 합니다. 나 참.
비둘기 앞에서 겨우 찾은, 시부룩한 아드님
여기 맞춰주면 저기서 난리고, 저기 맞춰주면 여기서 난리입니다. 동생은 왜 누나말만 듣냐 하고 누나는 왜 동생만 챙겨주냐 합니다. 이 여행은 앞으로도 일주일가량 진행되어야 하므로 누구 하나라도 삐져서는 안 됩니다. 집이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앉아있네! 싫음 말아라!" 하면 되는데, 여기서는 그랬다가는 대책도 없고 일정도 어그러지기 때문에 어떻게든 달래 가며 모시고 다녀야 합니다. 가장 성질 나쁜 상사를 모시고 (그것도 사이 안 좋은 상사 두 명) 해외로 출장 온 것과 다를 바 없죠. 어쨌든, 다시 솔로몬이 되어보자 마음을 다지고 둘째의 마음도 살살 풀어줍니다.
마음은 풀었는데 손이 꽁꽁입니다. 너무 춥고 배가 고픕니다. 타워브리지가 보이는 파이브가이즈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타워브리지를 감상하는 것이 저의 계획이었는데 아이들이 햄버거는 싫답니다. 그리고서는 라면을 먹자고 조릅니다.
"엄마. 라면 먹고 싶어. 여기서 호텔 멀어? 호텔 가서 라면 먹고 나오면 안 돼? 배고파. 배고픈데 밥 사 먹기 싫어."
곧 완전 어두워질 텐데, 지금 밖에 돌아다녀야 하는데, 이 주변에 맛집도 많이 찾아뒀는데.
이 짧고 소중한 낮 시간에 호텔에 가서 라면을 먹자니, 안 된다 하고 싶었지만 청소년의 라면에 대한 갈망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호텔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으슬으슬한 겨울 날씨에 아침 8시부터 오들오들 떨며 하루종일 밖에 있다가 호텔로 들어오니 긴장도 풀리고 편하게 누워 쉬기도 하고 좋았습니다. (사춘기 여행에서의 숙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접근성인 듯합니다. 언제라도 쉬고 싶다, 옷을 갈아입고 싶다, 뭘 놔두고 왔다 하면 금방 들어갔다 다시 나올만한 접근성이 아이들의 온순함을 유지시켜 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라면을 뙇!
오. 한국의 맛. ㅜㅜ
"엄마!! 여기서 먹은 것 중에 이게 젤 맛있어! 미쳤어!!"
하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을 먹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저도 편한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라면에 밥까지 말아먹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습니다. 저녁에는 'Frozen' 뮤지컬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아직 뮤지컬까지는 한참이 남았고, 호텔에 계속 있자니 시간도 아깝고 배도 부르고 에너지도 채웠으니 그 시간까지 무얼 할까 생각했습니다. 이 아까운 시간에 재빨리 무엇이라도 집어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벌써 너무 어두워져 체감상 밤인데요. 어떡하죠?
누워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중, 그날이 내셔널 갤러리에 야간 개장하는 요일이라는 것이 번뜩 생각났습니다.
"얘들아! 우리 해바라기 보러 가자! 지금이 기회야!!"
밖이었다면 보나 마나 지금 거길 왜 가냐며 투덜투덜했을 텐데, 라면도 먹었겠다, 따뜻한 이불속에서 좀 쉬기도 했겠다, 살짝 릴랙스가 된 저희 아이들이 흔쾌히 따라나섭니다. 역시 라면의 힘은 강력하네요.
다시 버스를 타고 내셔널갤러리로 갑니다.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지만 현장 입장도 가능해서 줄을 섭니다. 야간 개관 시간이 거의 1시간도 남지 않아서 줄 서는 인원도 없이 그냥 슉슉 들어갑니다. 고흐의 해바라기만 딱 보고 나올 생각이니 해바라기를 찾아서 바로 직행합니다. 원래는 해바라기 앞에 인파가 넘쳐나는데, 너무나 한산합니다. 가까이서 얼굴을 디밀어 노란색 해바라기 꽃잎 터치까지 관찰하며 감상하는 호사를 누려봅니다. 해바라기만 노리고 야간 개관으로 입장한 저 자신을 또 칭찬합니다.
"엄마, 이거 진짜 고흐 그림 맞아? 해바라기 말고도 더 있어!"
하며 고흐 그림을 마음껏 감상합니다. (모든 여행이 끝난 다음 알았지만, 이때가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ㅜㅜ ㅋㅋ)
윌리엄 터너, 네오나르도 다빈치.. 또 다른 유명한 그림들도 많았지만 그냥 다 패스합니다. 왜냐면 내셔널갤러리 정식 방문은 차후에 일정이 또 잡혀있거든요.
"자, 가자! 고흐 봤으니까, 나가자!"
하고 미련 없이 내셔널 갤러리를 빠져나왔습니다. 아이들도 대만족 입니다.
뮤지컬을 보러 갔습니다. 겨울왕국을 워낙 많이 봐서 노래도 줄줄 외우고 있는 저희 아이들이고, 워낙 평도 좋아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보기는 봤는데 안 본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희 셋은 뮤지컬을 보러 가서 헤드뱅잉을 하며 침을 질질 흘리며 잤습니다. 저희는 자러 갔습니다. 뮤지컬 티켓값이 저희 호텔 1박 비용이랑 비슷한데, 저희가 낸 티켓값은 공연비가 아니라 그냥 숙박비였습니다. 시차 적응에 성공했다 생각했지만 그건 두 발로 걸어 다닐 수밖에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눈을 뜨고 걸어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따땃하고 어두컴컴한 공연장에서는 저희 몸은 그냥 한국의 시간을 따라야만 했나 봅니다. 인터미션 시간에 서로 싸대기를 때려가며 잠을 깨려고 했지만 인간의 수면욕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Frozen' 뮤지컬은 후기랄 게 없습니다. 다른 데 가서 찾아보십셔.. 죄송. ㅋㅋ
셋 다 '돈 날렸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아무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춥고 배고픕니다. 피곤하고요. 씁쓸한 기분으로 호텔로 복귀합니다.
내일은 또 어떤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1. 방문지의 운영시간을 꼭 체크하세요!
찜질방 아닙니다. 연중무휴 아니에요. 박물관, 미술관, 성당.. 관광지들의 운영시간을 꼭 확인하세요. 미리 예약을 하며 일정을 잡으시려면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체크하셔야겠지만, 현장입장이나 다른 일정과 함께할 것을 계획하는 경우 반드시 시간을 체크하시길 바랍니다. 성당 같은 경우, 미사시간과 겹치는 시간에는 입장이 불가능하다거나, 행사가 있는 날에는 입장은 되지만 전망대는 못 올라가는 경우도 있으니 꼼꼼히 체크하세요. 기껏 갔는데, 문 닫았다? 사춘기 대폭발입니다. 조심하세요.
2. 박물관, 미술관은 야간개장을 잘 이용해 보세요!
이번 여행에서 제가 가장 잘 짠 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내셔널갤러리와 오르셰미술관을 야간개장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해바라기 실컷 봤고요, 오르셰미술관 시계 앞에서 줄 거의 안 서고 사진 찍었고요. 자연광이 있을 때 봐야 하는 작품이나 유적들은 낮 시간을 이용하시고요, 실내전시물이라 밤낮에 상관없는 작품들이 많으면 밤시간도 아주 괜찮습니다. 특히, 춥고 어두운 유럽의 저녁일정으로는 따뜻하고 쾌적한 미술관이 딱이더라고요. 각 박물관이나 미술관마다 일주일에 1번 정도는 야간 운영을 하고 있으니, 요일과 시간을 잘 체크하셔서 계획하세요.
3. 오픈 시간과 문 닫기 직전 시간을 공략하세요!
모나리자를 사람들이 왜 기대보다 별로라고 하는 걸까요? 시장바닥 같은 시끌벅적한 관람실의 분위기 때문 아닐까요? 조용한 공간에서 작품을 감상하면 작품을 즐기는 시간이 깊어지겠죠. 조금만 부지런하게 움직여서 사람이 적은 오픈시간이나 문 닫기 직전 시간을 이용해 보세요. 명작들과 눈 맞춤 하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사춘기 아이들은 사람 많은 곳, 극혐하고요. 인내력이 늘 바닥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세요!!
타워브리지 너무 멋졌지? 엄마는 바다나 호수 같은 자연 말고, 하루종일 가만히 보면서 앉아있고 싶다고 생각한 건축물은 타워브리지가 처음이야. '아름답다'라는 말 보다 '예쁘다'는 말이 너무 잘 어울리는 다리. 타워브리지.
타워브리지가 열리는 다리로 설계가 된 것은, 배가 오가기 위해서인 건 알지? 그런데, 엄마는 좀 궁금하더라. 런던이 지도로 보면, 바다에서는 좀 들어가 있는데 그럼 타워브리지부터 강 하류까지는 다리가 없는 건가? 아님, 있어도 다 열리는 다리로 되어있나?
그래서 가기 전에 엄마가 좀 찾아봤지.
일단, 타워브리지부터 강 하류까지는 '퀸 엘리자베스 2세 브리지'라는 아주 큰 다리 말고는 다리가 없어. 위 사진에서 제일 오른쪽에 다리 하나 있지? 그 다리 말이야. 그 두 다리 사이에 거리가 25km 정도 된대.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닌데, 그 중간에 다리가 없다니. 촘촘히 다리가 있는 한강을 생각하면 너무 신기하지?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 런던 중심부로 화물선이 들어오고, 무역이 이루어졌대. 그래서 배가 런던에 있는 주요 도크(Dock)까지 오려면 그 사이에는 다리를 만들면 안 됐었나 봐. 지금도 다리는 없지만, 하류 쪽으로는 템스강을 지나는 터널과 도크들이 있어서 자동차랑 지하철이 그걸 통해서 이동하나 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었군. 이제 타워브리지로 어디 가서 잘난 척할 수 있겠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