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춘기와의 여행, 또 떠나겠냐고 물으신다면.

에필로그

by 포도봉봉


딸과 아들과의 여행을 준비하면서 글, 책, 블로그, 유튜브를 찾아보다 보니 아름다운 이야기들만 가득했습니다. 어쩜 그렇게 다들 파워 J이신지, 여행은 동선도 일정도 사진도 완벽했고 우리 아이와 나이도 비슷한 그 집 아이들은 얼마나 학구적이신지, 역사며 미술작품이며 아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으신지 말이죠. 저도 당연히 그런 여행을 할 수 있을 줄 알았고, 저희 아이들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일자별로 시간별로 팔자에도 없는 J의 탈을 쓰고 수능공부하듯이 계획을 잡았죠.


사춘기와 함께 하는 여행은 후기가 극히 드물었습니다. 여행 카페에서만 종종 찾아볼 수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후기는 그리 아름다운 후기가 아니었습니다. 사춘기력 만땅인 딸과 함께 유럽여행을 떠나 사사건건 싸우고 파국을 맞이하여 인연 끊기 직전에 귀국했는데, 딸과 싸우느라 제대로 못 본 게 너무 많아서 혼자서 똑같은 코스로 여행을 떠나버린, 그래서 혼자라서 너무 행복하다는 어떤 어머니의 슬픈 사연이 있는 여행기였습니다. 그게 저 보라고 쓴 글인 줄도 모르고, '나는 이렇게는 안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행복하게 여행을 준비했었죠.


그러나 여행은 실전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이것은 여행인가, 희생인가, 징벌인가-

과연 나는 어떤 종류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이 여행은 어떤 범주로 분류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고 답은 찾지 못한 채 하루하루 정해진 일정을 이어나갔습니다.


여행의 순간순간에, 참 원망스러웠던 적이 많았습니다. 아름다운 후기와 여행기를 남긴 수많은 블로거들과 유튜버들에게요. 그래서, 진짜 현실 후기를 한 번 남겨보자 싶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너무 많거든요. 이런 망한 여행을 겪고 가족해체 직전에 여행을 마감하고 온 가족들이요.


그래서 이 여행이 얼마나 힘들고, 우리 딸이 얼마나 지랄 맞은 지, 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이 얼마나 극한체험인지를 기록하기 위해서 분노의 키보드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 같은 피해자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혹시나 사춘기와 함께 여행을 결심했다면 저의 글이 예방주사가 되기를 바라면서요.

그러나 여행기를 기록하는 동안, 아이들은 사진 속의 볼살 오동통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훌쩍 커버렸고, '세상에 이런 인간이 있나'하고 혀를 끌끌 차게 했던 저희 딸은 아주 조금은 철이 들어버렸습니다. 저도 생전 처음 맞아보는 사춘기의 뜨거운 맛에 정신 못 차리는 엄마에서는 조금 벗어나 살짝은, 억지로라도 아이의 어려움과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엄마가 되었구요.


누군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부모가 애들을 가르치면서 다녀야지, 큰돈 들여 여행 가서 애한테 쩔쩔매고 저게 뭐야.'

'유럽까지 가서 볼 건 보고 와야지. 애가 안 보겠다고 밖에서 휴대폰만 하는 걸 눈 뜨고 보고 있냐.'

하며 사춘기 앞에 굴복한 엄마인 저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저희 애 데리고 한번 여행해 보세요. 그런 말이 나오나.. ㅋㅋㅋ"


누군가와 동행하는 여행은 누구에게든 어렵습니다.

가장 마음 잘 맞는 절친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도, 무조건 싸우고 오게 되어있죠. 심하면 절교도 하고요.

야심 차게 계획한 부모님과의 효도여행에서 '이 돈 주고 이걸 먹냐', '한식 언제 먹냐', '언제 도착하냐' 등등 이제는 유명해져 버린 금지어들을 실시간으로 들으며, 각종 잔소리와 필터 없는 면박에 '다시는 효도여행 따위는 오지 않겠다' 하며 불효자로 다시 태어나서 오기도 하고요.


그러나 가장 여행하기 가장 어려운 동행자는 사춘기입니다. 그것도 내 자식.

부모인 우리는 여기까지 오기가 얼마나 힘든지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학생 때는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고, 대학생이 되면 시간은 있는데 돈이 없고, 사회인이 되면 일주일씩 휴가낼 기회가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10년에 한 번 돌아오는 명절 끼인 황금연휴가 얼마나 소중한지, 하지만 그 연휴에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떠날 수 없게 하는, 발목을 잡는 수십만 가지의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서울 게 없는 청소년들은 그런 사정을 모릅니다.

알리가 없죠.

살 날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ㅋㅋ


아직 여름방학, 겨울방학이 없는 인생을 상상조차 안 해본 나이.

아직 인생이 100년이나 남았다고 생각할 나이.

'나중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나이.

돈도 많이 벌고, 여행도 많이 가고,

영국이든 프랑스든 미국이든 남미든 어디든 '언제라도' 갈 수 있다 생각할 나이.


그런 아이들에게

"니네 여기 오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냐"

"돈 들여서 왔더니 뭐 하는 짓이냐"

"여기까지 와서 이걸 안 보냐"

"엄마는 니 나이 때 비행기도 못 타봤다"

하는 소리는 꼰대 엄빠의 흘러가는 말일뿐입니다. 말하는 사람만 답답하고, 듣는 아이의 태도에 더 화가 나니 이런 말 해봤자 부모만 손해죠. 여행도 맘에 안 드는데 기분만 상하고, 대체 얻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런 꼬라지를 보느니 여행, 안 가는 게 나은가요?

사춘기들이랑 어디 가면 어차피 싸우고 돈만 쓰니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그저 집에만 처박혀 있을까요?


저는, 그래도 떠나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아이는 너무나 빨리 크고, 순간은 힘들어도 시간은 빨리 지나갑니다. 아이도 크고 나도 빨리 늙습니다. 그 순간의 그 겨울, 또는 그 여름, 봄, 가을.

나와 우리 아이가 집 아닌 낯선 어느 곳에서 함께 버스를 타고, 길을 잃어보고, 맛없는 음식을 먹어보고, 다른 나라의 하늘을 보고 공기를 마셔보는 것 자체가 그 순간에만 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입니다.


엄마가 죽도록 싫으면 여행도 안 왔겠지, 그래도 따라와 줘서 고맙다.

하고 가방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키링처럼 하찮게 생각하고, 함께 다니시면서 '즐거운 여행'말고 '싸우지 않는 여행'이 되도록 마음을 다잡고, 아이가 간다고 할 때를 놓치지 말고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물론, 저 키링은 그냥 매달려 있지 않고 온갖 짜증을 내면서 자기 마음대로 줄을 풀고 길가에 주저앉아버리는 일도 종종 있지만. 내가 (아이가 아닙니다ㅋㅋ) 어른이 되는 시간이다~~ 생각하시고 '<토이스토리>인가? 인형 주제에 말을 하네?' 정도로 여기시면서 그냥 데리고 다니는데 의의를 두시면 별 일 없이 무사히 여행을 끝내실 수 있습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중고등학교 때 부모님과 함께 갔던 여행 중에 진짜 좋았고, 무언가를 많이 배웠던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으신가요? 없으시죠? 수학여행 가서 유적지 봐서 좋으셨나요? 유익하셨나요?

제가 학생들 데리고 제주도 수학여행을 가보면, 그 좋은 제주도에서 여학생들은 화장하느라 거울만 보고, 남학생들은 게임하느라 휴대폰만 봅니다. 10대들은 다 그렇습니다. 휴대폰은 그냥 제6의 손가락 정도의 존재입니다. 늘 붙어있고 뗄 수 없어요. 그러나 거울만 보던 여학생들도 평소 말 한번 안 해보던 선생님들이 "오늘 너무 예쁘네"라고 한마디 해주면 배시시 웃으며 행복해하고, 휴대폰만 보는 남학생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수학여행이라고 머리에 왁스도 좀 바르고, 옷도 나름대로 새 옷으로 사 입고 온 것이 무지 귀엽습니다.

이것이 그 나이 때의 여행의 설렘 아닐까요?


저희 아이들도 그럴 것입니다.

비록 옥스포드에서도, 오페라 가르니에에서도, 루브르 광장에서도 휴대폰만 하고 있었지만, 자기 얼굴 사진에 찍히는 건 질색팔색을 하면서도 멋들어진 신호등과 이국적인 표지판 앞에서 자기 그림자 사진을 찍어 남기는 것으로 여행을 만끽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속이 터져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여행의 설렘을 느끼고 있을지도요.



서로에게 인생에 함께 할 수 있는 여행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있을지, 모르는 지금.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돌아오는 기차나 비행기 안에서는 '다시는 내가 너랑 여행 오나 봐라'라는 생각이 치밀어 오르더라도, 낯선 곳에 앉아 함께 느꼈던 바람과 햇빛을 기억하며 "그때 진짜 좋았는데!"라고 서로가 같은 기억으로 추억할 수 있도록. 부디 싸우지 말고, 소리 높이지 말고.

참아야 된다면 부모가, 어른이, 성인이. 기꺼이 참아주며 안온한 여행을 즐기시길 기도합니다.

그때 저의 이 현실 여행기가 여러분들의 마음 수련에 조그마한 안내서로 쓰이기를 바랍니다.


"엄마! 나 루브르가지 가서 안 들어간다고 했을 때 어땠어? 진짜 기가 찼겠다."

"엄마, 나 진짜 그때 고집 대단했었지?"

라는 말을 언젠가는 들을 말이 있겠죠?

(아직은 죽어도 안 합니다. ㅋㅋ 전부 다 엄마 때문이랍니다.)


저희 딸과 아들은 이 여행은 그래도 정말 재미있었다고, 나중에 또 가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들은 자기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는 어느 나라에 갈 거냐고 물어보고요. 저도 또 가고 싶은데, 아이가 대학 가기 전에 이런 기회가 다시 생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그리 한가한 종족들이 아니라서요.

그래서, 더 크기 전에. 더 바빠지기 전에. 따라간다고 할 때, 어디든 언제든 꼭 함께 가셔서, 현재 나의 가장 젊은 시절과 아이의 찬란한 그 순간을 꼭 추억으로 남겨 오시길 바랍니다.




진짜 마지막으로,

제 마음대로 정리한 [사춘기와의 여행 십계명]을 남겨봅니다.

비웃지 마시고, 마음에 새겨보세요. 언젠가는 필요하실지도?


[사춘기와의 여행 십계명]

1. 『여기까지 와서』 금지

2. 『이게 돈이 얼만데』 금지

3. 『이럴 거면 왜 왔냐』 금지

4. 『박물관 및 미술관 강제 입장』 금지

5. 『사전 동의 없는 교육적 투어』 금지

6. 『여행지에서 만난 다른 집 착해 보이는 자식과 비교』 금지 (하지만 유난히 눈에 띄긴 합디다)

7. 『본전 생각』금지 (사람은 안 다치고 차는 반파된 교통사고 났다고 생각하세요..ㅋㅋ)

8. 『나는 이제 언제 여기 또 오겠냐』금지 (집에 오면 바로 죽습니까? 나중에 또 가세요 ㅋㅋ)

9. 『못마땅한 표정 & 눈빛』금지 (이걸로 트집 잡혀요 ㅋㅋ 비즈니스 마인드로 친절하게..)

10.『들으라는 듯이 하는 아이 험담』금지 (아이 몰래 톡으로 하세요.. 뒷담은 뒤에서 하는 게 매너죠..ㅋㅋ)






* 짧은 여행으로 장황한 만연체 여행기를 써냈습니다. 긴 이야기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쓰면서도 좋았지만, 여러분들의 크고 작은 애정어린 리액션에 두배로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무럭무럭 자라세요 ♡



























keyword
이전 20화와. 루브르도 안 들어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