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저는 꽤 오랫동안 소설을 멀리 했어요.
올해 들어 29권의 책을 읽었는데, 소설은 딱 한 권뿐이네요.
사실 옛날에도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관심 있는 작가의 소설은 종종 읽곤 했었는데,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고민해 봤습니다. 소설을 왜 읽지 않을까?
소설에서 멀어진 이유는 다양했어요.
우선 긴 텍스트를 읽기에는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해요.
지식이 담긴 책, 이를테면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예술' 같은 비문학 책들은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읽을 수 있죠.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면 얻어가는 게 분명해요. 하지만 소설은 이야기 자체를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 얻는 게 분명하지 않죠.
그리고 대체제도 너무 많아졌어요.
물론 비문학 책도 대체제가 많지만, 책의 형식으로 읽을 때 가장 정제된 형태의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책의 형식으로 읽는 데 장점이 있어요.
하지만 소설은 이야기인데, 이야기를 흥미롭게 소비할 수 있는 매체가 넘쳐나죠. 같은 이야기라도 영화는 스펙터클하고, 유튜브 영상은 자극적이고 빠르고, 웹툰은 가볍습니다.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며 이야기를 즐길 필요가 구태여 없다고 느끼는 것이죠.
그럼, 소설은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 한 권의 책을 알게 되었어요.
<소설의 기술>이라는 책이에요.
<소설의 기술>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작가 밀란 쿤데라가 소설의 존재 가치에 대해 쓴 글과 인터뷰한 내용을 모아둔 책인데요. 이 책을 읽으면서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달라졌어요.
소설: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
소설의 정의는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쿤데라는 '위대한 소설'을 또 한 번 정의하고 있어요. '실존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소설은 실제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탐색하는 겁니다. 그런데 실존이란 실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인간의 가능성의 영역이지요. 인간이 될 수 있는 모든 것,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 그러니까 인물과 그의 세계를 ‘가능성’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겁니다.
쿤데라는 위대한 소설가들은 시대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실존 범주'가 어떻게 뒤바뀌는지를 탐구한다고 해요. 여기서 '실존 범주'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에 관한 기준점을 말해요.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마다 각자의 타고난 성격이나 기질 - 즉 캐릭터가 있죠. 이런 캐릭터가 그 사람이 처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탐구한다는 것이에요.
이런 탐구가 중요해진 이유는 외부 세계의 영향력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에요. 먼 과거에는 한 인간이 마주해야 하는 세계의 크기와 영향력이 작았을 거예요. 근대적인 사유는 내면의 논리적 사고를 추구했고, 내면적 탐구를 통해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시대였죠.
하지만 현대로 넘어오면서 세계의 크기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어요. 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압력이 커지면서, 더 이상 개인 내면의 탐구로는 해답을 얻는 게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죠.
이런 맥락에서 체코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내면적 동기가 더 이상 아무런 무게도 지니지 못하게 될 만큼 외부적 결정이 압도적인 것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아직 인간에게 남아있는 가능성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탐구하는 글을 썼어요.
이처럼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은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에서 한 인간이 단순한 부품으로 전락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라고 할 수 있어요.
인간의 실존 범주와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 소설이라고 한다면, 영화나 유튜브, 웹툰이 그 기능을 할 순 없을까요? 물론 어느 정도는 그 역할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소설이 가진 복잡성을 대체할 수는 없을 거예요.
영화나 유튜브나 웹툰이 다루지 못하는 것은 복잡함이에요.
소설을 영화화할 때 항상 나오는 이야기가 있죠. "인물의 동기가 약해졌다.", "개연성이 떨어졌다." 같은 것들이요. 이런 불만이 나오는 이유는 매체의 특성 때문이에요.
소설은 분량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글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충분한 묘사를 할 수 있지만 영상물과 같은 형식은 꼭 필요한 내용만 남길 수밖에 없어요. 그 과정에서 원래의 소설이 가지고 있던 모호함은 사라지고 명료한 이야기의 흐름이 남게 되죠.
현대는 명료함을 추구해요. 철학과 과학이 대표적이죠.
<소설의 기술>에서는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 이후의 철학, 과학등의 학문이 인간을 추상적이고 단순하게 이해한다고 해요. A or B,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하지만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로 대표되는 소설은 불확실함의 지혜, 세계의 애매성을 이야기한다고 해요.
인간은 현대에 들어 점점 더 모호성에서 벗어나 확실한 지식을 구축해나가려고 하고 있어요.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단순한 존재이던가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하나의 이유만 있지 않죠. 선과 악이라는 것도 분명하지 않아요. 인간은 다층적인 존재죠.
하지만 매스미디어는 그런 다층적이고 복잡한 모습을 지워갑니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 정하고, 정답과 오답을 딱 잘라 구분하죠. 실존 범주를 '사회성'으로 한정하고 '개인성'은 말살하고 말죠.
위대한 소설은 단순 명료함에서 벗어나 모호성을 추구해요. 한 인간이 사회적 맥락 속에 놓였을 때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그 개인의 캐릭터가 어떻게 외부의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지를 천천히, 주의 깊게 탐구하죠.
세계의 사태가 생각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렇게 우리는 인간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고, 나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고, 사회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게 됩니다.
위대한 소설은 개인의 실존 범주(개인의 존재를 파악하기 위한 기준점)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바뀌는지 살펴보되, 세계의 복잡성을 회피하지 않고 애매함의 정신으로 천천히 인간을 탐구한다.
이게 소설이 가진 가치가 아닐까요?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가 명료해진 것 같아요.
'소설은 삶을 여러 번 살게 한다.'
인간은 한 번 태어나 한 번 죽죠. 오로지 자신의 삶 하나 밖에 살지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소설을 읽는다면 다른 이의 삶을 간접 경험하게 됩니다. 한 개인이 외부의 상황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보고, 개인이 얼마나 복잡한 사람인지 알 수 있겠죠. 그렇게 인간에 대한 이해가 쌓이면 사회와 미디어가 제시한 기준을 벗어나 더 넓은 관점으로 타인을 포용하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소설의 기술>이라는 책을 아래 영상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더 깊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하세요 :)
https://youtu.be/Yctv9QiNdOU?si=Q-5Urh5nEcDM-P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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