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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크어버드 Sep 07. 2020

여행에 이유가 있긴 했겠지?

코로나 19 전의 여행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캐주얼 다이닝'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여행을 떠나는데 다양한 이유가 있긴 하지만 게스트하우스는 아무래도 사람과의 만남으로 그 이유가 완성되는 느낌이다. 손님들을 위해 기획한 행사이긴 하지만 우리 역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터라 조금 힘들더라도 한 달에 1~2번 정도는 행사를 열곤 했다. 함께 먹을 안주는 호스트인 우리가 준비하고 술은 각자 준비해오는 형식으로 이름 그래도 캐주얼하게 좋아하는 술, 음료에 잔잔한 이야기가 오가는 행사로 생각하면 되겠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인지라 어색하지 않도록 본인의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가벼운 설문지를 준비했고 이를 주제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주로 혼자 또는 친구 한 명 정도의 소규모로 참석하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기억이 남는 손님들이 있다.


캐주얼 다이닝이 열리는 테이블




행사 첫날엔 3대 가족이(할머니, 엄마, 딸) 방문했다! 그동안 모녀 여행은 있었지만 이렇게 3대 가족이 타인과 함께 사용하는 도미토리 6인실에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예약 단계부터 불편할 수 있는 사항에 대해 충분히 설명드렸으나 의외로 쿨하게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아 좋다며 흔쾌히 방문해 주셨다. 생애 처음으로 3대 가족이 떠난 여행이라고 하셨는데 딸이 태어나면서부터 꿈꿔온 여행이라고 하니 그 꿈을 이루기까지 무려 17년이란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마저도 너무 바빠 간신히 2박 3일의 일정으로 오셨는데 그분들의 소중한 시간에 좋은 추억을 만들어드린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가족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바로 70대이신 할머니셨다. 할머님께선 젊은 시절부터 외국에 많이 다니시고 늦은 나이까지 계속 사회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예전부터 젊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셨는데 그들과 이야기하는 순간만큼은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을 느끼신다며 비슷한 또래보다는 젊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 하셨다.


당시 대부분 20대 중반~30대 중반의 손님들이었지만 전혀 위화감 없이 소통할 수 있는 할머님의 여유로움과 지혜가 무척이나 인상 깊었고, 나 역시 언젠가 나이가 들면 할머니처럼 이렇게 지혜롭고 인자한 모습이 됐으면 할 정도로 품위가 묻어 나오시는 분이었다. 함께 오신 40대 어머님도 굉장히 밟고 쿨한 마인드의 엄마셨는데 한창 연애에 관심 많고 놀러 다닐 10대 딸이 집순이라며 좀 나가서 남자 친구도 사귀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했으면 하는 마음에 오늘 행사에 신청하셨다고 한다. 딸은 집에 있는 게 좋다는데 엄마는 자유분방하게 생활하라며 딸에게 장난스레 다그치는 모습이 모두에게 웃음을 자아냈다. 아무래도 이 가족 앞으로도 너무 잘 살 것 같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다 보면 이렇게 가족끼리 방문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무래도 친구 같은 엄마와 딸의 모녀 여행이 가장 많은 편이고 모자 여행은 딱 한 번! 본 것 같다 ^^; 이래서 다들 "딸, 딸" 하나보다. 그나저나 곧 태어날 우리 아들도 크면 엄마랑 같이 안 다니겠지??




한가한 일요일 오후 해안 도로를 드라이브하던 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당일 숙박이 가능한지 묻는 전화였는데 도착 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어 예약을 진행해 드렸다. 조금 뒤 5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방금 예약하신 남자분의 숙박료를 지불하고 싶다고 하셨다. 목소리가 어머님이신 것 같아 예약자분 성함이 맞는지 확인 후에 입금 절차를 알려드렸다. 숙박료가 입금된 것을 확인하고 가게로 돌아오니 마침 예약하신 손님께서 도착하셔서 체크인을 도와 드렸다. 마침 그날은 혼자서 사용하실 예정이라 객실 전체 사용 방법을 알려 드리고 퇴근하려는데 갑자기 우릴 불러 숙박료를 주시는 거였다.
 
“어? 아까 예약하신 뒤 어머님? 같은 분께서 입금해 주셨는데.. 혹시 연락 못 받으셨어요?”
“네?? 정말요?? 아.. 그분이요..?! 그렇구나.. 아이고 감사해라.”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적잖게 당황하는 우리 모습을 보고 손님께서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셨다. 알고 보니 방금 오신 손님은 아프리카 TV에서 방송을 하시는 분이신데 우연히 구독자 중 한 분이 이곳 시골 마을에 살고 계셨다고 한다. 그 구독자분께서 방송을 보던 중 자기 마을에 방문한 걸 알게 되자 너무 반가운 마음에 숙박료를 대신해서 지불해 주신 것이다. 상상도 못 했던 전개라 들으면서도 놀라웠는데 정말이지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방문하신 분도 유명한 BJ가 아닌 이제 막 방송을 시작하신 분으로 몇십 명 안 되는 구독자 중 한 분이 마침 이 곳에 살고 계실 줄이야!


그날 밤 선한 기운을 받은 BJ께선 묵호 야경을 배경으로 라이브 방송을 하셨고 입금해 주신 청취자분께도 방송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다음 날 조식 시간에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알고 보니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다니며 이제 막 방송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퇴사 후 전부터 해보고 싶던 방송을 해볼까 해서 시작한 건데 의외로 반응이 좋다고 한다. 아직 구독자가 많지는 않지만, 방송 수입만으로 여행을 다니고 있다고 하니 말이다.


직장에선 늘 비슷한 환경과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살았는데 바깥세상에 나와보니 역시 세상은 참 넓고 직업은 다양하다는 걸 느끼게 된 계기였다. 남은 몇 달 간의 국내 여행 일정이 마무리되면 앞으로는 해외로 나가 여행할 계획이라고 하셨는데 지금쯤은 아마 모두 마치고 귀국하셨을 것 같다. 아프리카 TV는 잘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그사이 그가 바란대로 제법 유명한 BJ가 됐으려나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건 모두에게서 여행을 빼앗아간 코로나 19는 다행히 잘 피해 가신 것 같다.


라이브 방송하기 딱 좋은 초가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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