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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만언니 May 12. 2023

12화_누렁이를 키우는 자격지심

당신의 품종은?

우리는 상대를 겉모습으로 쉽게 판단한다. 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왜 있겠는가. 대부분의 경우 겉모습은 겉모습일 뿐이다.


우리나라는 비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아 그런지, 여전히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어 그런지 유달리 남의 시선에 민감하다. 그래서일까. 미국의 한 투자 회사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은 전 세계에서 명품 소비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해된다. 서울 번화가에선 오 분에 한 번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자주 명품 가방 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사회 초년생 시절엔 친구들 따라 명품을 샀다. 그런데 웬걸 명품이라는 게 아무나 쓰는 게 아니더라. 개 발에 편자라더니 나처럼 칠칠맞고 물건 험하게 쓰는 사람에게는 그저 보기 좋은 허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더라. 그래서 어느 날 전부 처분하고 에코백에 운동화를 신고 다니고 있다. 싸구려 가방을 들고 다니니 물이 묻어도 때가 타도 신경 안 쓰여 좋다.

이런 차림이 젊어서는 괜찮았는데 나이를 먹으니 후줄근한 차림 때문에 더러 곤혹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언제 한 번은 미국 사는 언니 심부름으로 부암동의 한 부동산에 단독주택 전세를 보러 갔는데 입구에서부터 퇴짜를 맞았다.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중개사는 앉은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고 아래위로 내 꼬락서니를 딱 한 번 훑더니 김 빠진 얼굴로 왜 왔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마당 있는 전셋집을 찾고 있다 하니 안경을 벗고는 한숨을 푹 쉬며 자기네 부동산은 10억 이하 물건 없다고 한다. 그 말에 내가 '그 가격도 괜찮다'라고 하니 그 양반은 내가 날 더운데 실없는 장난이라도 치는 줄 알았는지 매물 없으니 그냥 가라고 했다. 뒤통수가 얼얼하게 냉대를 당하면서도 당시에 나는 그분이 나한테 왜 그러는지 몰랐다.


또 한 번은 호텔 식당에 저녁 약속이 있어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직원이 후다닥 달려오더니 여기다 차를 대면 어쩌냐고 성질을 낸다. 그래서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투숙객이랑 식당에 가려는데 그럼 차를 어디다 대야 하느냐 물으니 그분이 갑자기 얼굴을 싹 바꾸더니 자기가 대신 주차해 줄 테니 내리라고 한다. 그제야 알았다. 사람들이 이런 꼴 안 당하려고 좋은 옷 입고 좋은 가방을 메고 다닌다는 것을.


물론 내가 무엇을 입고 어떤 위치에 있든 그들은 내게 조금 더 친절했어야 했다. 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나도 어지간히 추레하게 하고 다녔다. 그래서 요즘 나는 어디 가서 면전에서 홀대받지 않을 만큼, 딱 그만큼은 차려입고 다닌다.

희한한 건 누가 나를 홀대하고 무시하는 건 그 사람이 날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 화가 하나도 안 난다. 그런데 누가 우리 개 복주, 그러니까 진도믹스 누렁이를 무시하면 그렇게 화가 난다. 요즘 친구들 말을 빌리자면 '발작 버튼'이 제대로 눌린다고나 할까.


우연찮게 시베리안허스키라는 품종견인 해탈이랑 진도믹스인 복주를 같이 키우다 보니 누렁이에 대한 사람들의 차별과 편견을 더 절절하게 느끼는 것 같다. 정말 산책 중 만나는 열에 아홉은 품종견인 해탈이한테 호감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복주는 아무나 따르지 않고, 해탈이는 본래 애교도 많고 사람 좋아해서 그런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 놓일 때마다 곁에서 해탈이가 예쁨 받는 걸 보는 복주가 노상 맘에 걸린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나는 자꾸 복주를 과하게 꾸미게 됐다. 남들 눈에 예뻐 보였으면 좋겠기에 말이다. 내 옷은커녕 같이 사는 시베리안 허스키인 해탈이한테는 옷 한 벌 안 사주지만 복주한테는 온갖 아이템을 사준다. 누구도 우리 개를 함부로 무시하지 않았으면 싶어서 말이다. 이렇게 사랑받고 크고 있다고 광고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랬더니 어라? 사람들이 확실히 복주를 덜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누렁이가 티셔츠 하나 입었다고 토이푸들이 되는 것도 아닌데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인간 중심적 사고를 하는지 알게 됐다. 

전에는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실현 가능성 없는 쓸데없는 상상은 안 하고 살았는데 요즘은 틈날 때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오성급 호텔에 복주랑 복주 친구들을 잔뜩 불러 데리고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 호텔 측에서는 나한테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우리를 내쫓겠지. 그러면 나는 그들의 입이 떡 벌어질 만큼의 돈을 가방에서 꺼내 로비에 뿌리는 거다(어디까지나 상상이다). 그리고 누렁이들과 당당하게 호텔 로비를 활보하는 거지 또 남의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위트룸에 올라가 개들과 신나게 뛰어노는 상상 말이다. 


사실 이보다 더 현실적인 꿈은 훨씬 더 자주 꾸는데, 그건 바로 우리가 60년대 미국의 흑인차별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사람이 그러냐고 인상을 쓰듯 멀지 않은 미래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지금 이 시대의 전 방위적인 동물학대 이야기를 들으며 지독한 야만의 시절이었다고 생각해 줬으면 한다는 것이다. 또 그때는 부디 누렁이를 포함해 지구상에 있는 모든 털친구들이 "존재 자체"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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