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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만언니 Mar 28. 2024

17화_개를 사랑하는 각기 다른 방법에 대하여

개와 함께 행복해지는 일

나이 오십이 되니 남을 위하며 사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구나 거듭 깨닫는다. 가령 구걸하는 거지한테 돈 얼마를 줄 때도 그렇다. 깡통에 동전을 던져 쨍그랑 소리를 세상 요란하게 내며 도울 수도 있고 조용히 다가가 살며시 지폐를 놓고 올 수도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적선 방법은 그들이 길거리 생활을 빨리 접고 사회 안전망으로 들어갈 수 있게 그들에게 동전 하나 안 주는 것이다. 수입이 없으면 더는 길거리를 배회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재활 시설로 하루라도 빨리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전에 보육원 봉사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분이 앞치마에 캔디를 잔뜩 넣고 와 아가들 입에 단 것들을 수녀님 몰래 한 알씩 넣어주는 일. 짐작컨대 그분은 아마 사람만 보면 안아 달라 울고 보채는 아이들이 딱해서 그랬으리라. 하지만 이런 짓은 시설에서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왜냐, 일단 아이들은 단 걸 입에 대기 시작하면 이유식을 안 먹는다. 밥을 배 불리 못 먹으면 배가 고파 밤에 잠을 잘 못 자고 잠을 잘 못 자면 다음 날까지 컨디션이 안 좋아 종일 떼를 쓴다. 결국 애들과 수녀님 모두 괴로워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분은 여기까지는 생각 못했으리라. 그저 아이들이 딱해서 혹은 아이들을 위해서 그랬으리라. 하긴 보육원에 따로 시간 내어 봉사 오는 사람이 애들 잘못되라고 부러 그럴리야 있겠느냐만.


이 일을 겪으며 나는 종종 어떤 일을 할 때마다 그 아주머니를  떠 올린다. 혹여 내가 하는 일이 지금 나한테는 좋지만 남에게도 좋을까 반문하는 일. 한데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당연하다. 남의 속 마음은 잘 보이지 않고 상대가 말을 하지 않는 이상 그 심사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나 같은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남을 돕거나 이해한다. 어쩌면 이 방법이 가장 보편적일 수 있다. 대체로 내가 좋은 건 남도 좋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저런 일은 아주 간혹 발생한다. 아주아주 간혹.

요즘 개를 키우면서 나는 가끔 그때 그 아주머니를 떠올린다. 내가 하는 행동이 과연 개를 위하는 걸까 인간인 내 입장에서만 좋은 걸까. 물론 대부분의 일은 나 좋자고 하는 일이다. 그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라도 자꾸 경각심을 갖는다.


왜냐면 애초에 개들을 집에 들일 때 함께 행복하고자 시작 한 거지 나 혼자 행복하고자 저 친구들을 데려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개들과 나 사이에 있어 어떤 결정을 할 때 가능하면 둘 다 좋은 일로 한다. 말하자면 내가 개를 키우며 추구하는 방식은 ‘개 죽고 나 살자’도 아니고 ‘나 죽고 개 살자’도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 일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사람 사이도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기 어렵듯 개 하고 인간 사이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우리는 언어도 다르고 생활 습관도 다르다. 그러니 적당히 서로 양보해야 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거의 대부분 개들이 내게 양보하지만 나 역시 만만치 않게 개들한테 양보하려 노력한다.  


산책만 해도 그렇다. 집에서는 죽어도 배변하지 않는 개들 때문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 세 번씩 꼬박꼬박 나가 걷는다. 찬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겨울날엔 손이 오그라들어 배변봉투를 입으로 벌린 적이 한두 번 아니고 , 밤낮으로 푹푹 찌던 습도 높은 어느 여름날엔 땀이 눈에 들어가 눈 도 뜨기 어려운 와중에 오만 데 모기한테 뜯겨 눈 두 덩이까지 두툼하게 부어오르기 일쑤다. 하지만 이에 대해 군 소리 한 번 안 한다. 사방이 꽉 막힌 집구석에서 종일 답답했을 개들을 생각해서 말이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개 하고 사는 일도 다르지 않다. 두 녀석 모두 반려 생활 2년을 넘으니 더는 내게 과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믿기 어렵겠지만 개들이 어려서는 내게 집에 가지 말고 밖에서 밤새 놀자거나 고양이나 새를 함께 잡으러 가자고 고집을 부렸다. 그런데 요즘은 일절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나 역시 더는 개들이 누군가 빚어 놓은 조각상처럼 제 자리에 얌전히 앉아있길 바라지 않는다. 이제 서로 적당히 어떤 게 되고 어떤 게 안 되는지 알게 됐다고 해야 할까.


그간 개를 키우며 참 많은 데를 다녔다. 처음엔 사회화를 목적으로 그다음엔 도시 생활의 스트레스를 줄여주기 위해. 덕분에 사람들이 참 다양한 방식으로 개를 키운다는 걸 알게 됐다.


어느 해 여름이었다. 반려견 놀이터에 어떤 보호자가 개 한 마리를 솜이불에 꽁꽁 싸매고 왔다. 속으로 날도 더운데 저러고 왔으면 필시 개가 아프거나 늙었거나 둘 중 하나겠거니 했다. 한데 아니었다. 주인의 품에서 풀려난 개는 아주 건강하고 멀쩡한 한 살짜리 시바견이었다. 그 친구는 땅에 발을 딛기 무섭게 이리 저리 뛰며 개 친구들 냄새 맡기에 열중했다. 그러다 우리 복주와 잠깐 악어 놀이를 했다. (*악어놀이: 개들끼리 서로 입을 벌리고 상대를 무는 시늉을 하며 노는 놀이)


그때 시바견의 보호자가 내게 불같이 화를 냈다. 이유인즉 지금 너희 개가 우리 개를 물려고 하는데 왜 안 말리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건 노는 거지 물고 뜯는 게 아니다 하니까. 세상 어느 누가 이러고 노느냐고 한다. 속으로 ’ 누가 이러고 놀긴 개들이 이러고 놀지 ‘ 했지만 아무리 봐도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개들을 챙겨 내가 밖으로 나와 버렸다. 밖에 나가 한참 줄 산책을 하고 오니 그분 혼자 아무도 없는 개 놀이터에서 자기 개를 오도카니 탁자에 앉혀두고 비눗방울을 호호 불며 놀고 있었다. 그러면서 개한테 연신 좋지? 어때 예쁘지? 하며 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개는 모르겠지만 비눗방울을 부는 보호자는 확실히 행복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한 번은 어찌어찌 어느 품종견을 키우는 분을 만났다. 그는 내가 개를 키운다는 얘기에 반색해 자신이 얼마나 개를 얼마나 정성껏 돌보는지 장광설을 풀어놓았다. 한데 다른 건 하나도 기억 안 나고 그분이 설교중 절대라는 말을 아주 많이 썼다는 건 지금도 기억난다. 이런 것은 절대 안 먹인다. 저런 짓은 절대 안 한다. 절대 절대 절대.


사실 나는 인간이나 개나 기분이 좋아야 건강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제 아무리 좋은 걸 먹고 입어도 스트레스가 심하면 말짱 도루묵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개들한테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는 것 외에는 행동에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는 편이다. 산책 중에 흙을 먹어도 풀을 뜯어도 어지간해선 말리지 않는다. 해충 약을 친데가 아니라면 그저 개가 알아서 하게 둔다. 한데 그분은 이런 나를 도대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그는 내가 반려견 놀이터에 매일 간다 소리를 듣더니 가슴에 손을 얹고 들어서는 안 될 소리를 들은 표정으로 어떻게 그렇게 위험한 데 개들을 데려갈 수 있느냐 물었다. 그러더니 어중이떠중이 다 오는 그런 데서 누가 우리 개를 물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야단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혹시라도 우리 아이가 다른 개한테 물릴까 봐 그런데는 절대 절대로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에 내가 뭐라고 응수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속으로 그 친구 참 외롭겠구나 했던 생각은 난다.(개도 우리처럼 친구가 필요하다. 아닌 경우도 있지만)


친한 훈련사 말도 그렇고 내 생각에도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자주 보이는 보호자들은 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개를 인간처럼 대하는 이들이다. 자신의 반려견을 극진히 대하는 건 대체로 좋아 보이지만 가끔은 그 사랑이 과연 개 입장에서도 좋을까 싶을 때도 있다. 물론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인간의 오랜 친구인 개를 단순히 먹고 싸는 가축취급 하는 것보다는 백번이고 천 번이고 낫기 때문에. 다만 새삼 깨달을 뿐이다. 뭐든 넘치면 독이 된다던 공자님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숙집으로 다시 돌아온 배달이 근황을 전하면, 하숙집 언니 오빠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배달이는 이제 더 이상 발자국 소리에 소스라치지 않고, 잘 자고 잘 먹고 잘 논다고 한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거의 모든 게 예전만큼 돌아왔다고 한다. 다행이다. 얼굴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리고 배달이의 딱한 사정을 접한 이들이 조심스레 입양문의를 타진해 온다고 한다. 하지만 하숙집 누나와 택배들 구조자인 지구누나는 전에 한 번 데었기 때문에 입양 희망자들을 여간 깐깐하게 따지는 게 아니다. 이를 지켜보며 나는 속으로 저러다 배달이 어디 입양 가겠나. 하숙집에 영원히 눌러앉겠네 했다 (희망사항이다)


헌데 엊그제 하숙집 누나 말이 배달이를 사랑으로 품어 줄 집이 드디어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 얘기는

아윌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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