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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만언니 Mar 28. 2024

18화_개를 사랑하는 각기 다른 방법에 대하여

개와 함께 행복해지는 일

요즘 개를 키우면서도 종종 내 행동을 돌아본다. 내가 하는 이 일이 과연 개를 위하는 걸까 인간인 내 입장에서만 좋은 걸까. 물론 대부분의 일은 나 좋자고 하는 일이다. 그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래도 개와 나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 보려 애는 쓴다.  

애초에 개들을 집에 들일 때 함께 행복하고자 시작 한 거지 나 혼자 행복하고자 저 친구들을 데려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개들과 나 사이에 있어 어떤 결정을 할 때 가능하면 둘 다 좋은 일로 한다. 말하자면 내가 개를 키우며 추구하는 방식은 ‘개 죽고 나 살자’도 아니고 ‘나 죽고 개 살자’도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 일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사람 사이도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기 어렵듯 개 하고 인간 사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어도 다르고 생활 습관도 다르다. 그러니 적당히 서로 양보해야 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거의 대부분 개들이 내게 양보하지만 나 역시 만만치 않게 개들한테 양보한다.  


산책만 해도 그렇다. 집에서는 죽어도 배변하지 않는 개들 때문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 세 번씩 꼬박꼬박 나가 걷는다. 찬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겨울날엔 손이 오그라들어 배변봉투를 입으로 벌린 적이 한두 번 아니고 , 밤낮으로 푹푹 찌던 습도 높은 어느 여름날엔 땀이 눈에 들어가 눈 도 뜨기 어려운 와중에 오만 데 모기한테 뜯겨 눈 두 덩이까지 두툼하게 부어오른 것도 부지기수다. 그래도 묵묵히 나가 걷는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이 일은 분명 개 좋으라고 하는 거지 나 좋자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아마 누가 돈 주고 하라고 하라고 해도 못 할 것 같다. 반려 생활 삼 년이 넘었지만 이는 도무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산책이라고 하니 퍽 우아하고 여유롭게 개와 나가 걷는 줄 알겠지만 천만에 서울에서 큰 개와 두 마리와 다니는 건 산책이 아니라 일이다. 외부 자극에 민감한 복주와 뭐든 코를 대봐야 직성이 풀리는 호기심 천국인 해탈이랑 나가 걷는 건 작전 수행하듯 철저한 계획아래 시행해야 한다. 안 그러면 사고와 직결된다. 그나마 이제 서로 눈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태라 서로의 요구사항이 조율 가능하지만 반려 초반에는 정말이지 힘들었다.


요즘 복주나 해탈이가 산책하는 걸 보면 상상 못 하겠지만 어려서는 우리 개들도 내게 고양이나 새를 함께 잡으러 함께 가자고 한다거나 홀로 더 산책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곤 했다. 그때마다 개와 나는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말이나 통해야 내일 다시 오자고 하지. 그땐 서로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목줄을 서로 팽팽하게 당기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의견을 조율해야 할 땐 서로 눈을 보고 이야기한다.


생각해 보니 그간 개를 키우며 참 많은 데를 다녔다. 처음엔 사회화를 목적으로 도시의 애견 카페와 반려견 운동장을, 그다음엔 지방으로 또 경기도 포천의 달방으로. 덕분에 사람들은 생긴 것만큼 다르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개를 키운다는 걸 알게 됐다. 더러는 경외심이 들 정도로 자신의 개를 이해하고 인내하며 잘 키우는 분들도 봤고,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고개가 자꾸 모로 돌아가게 되는 사람도 봤다.


언제 한 번은 반려견 놀이터에 누가 한 여름에 개 한 마리를 솜이불로 꽁꽁 싸매고 왔다. 속으로 날도 더운데 저러고 왔다면 필시 개가 많이 아프거나 늙었거나 둘 중 하나겠거니 했다. 한데 웬걸 아니었다. 주인의 품에서 풀려난 개는 아주 건강하고 씩씩한 한 살짜리 시바견이었다. 그 친구는 땅에 발을 딛기 무섭게 이리저리 뛰며 개 친구들 냄새 맡기에 열중했다. 그러다 우리 복주와 잠깐 악어 놀이를 했다. (*악어놀이: 개들끼리 서로 입을 벌리고 상대를 무는 시늉을 하며 노는 놀이)


그때였다. 갑자기 시바견의 보호자가 내게 불같이 화를 냈다. 이유인즉 지금 너희 개가 우리 개를 물려고 하는데 너는 왜 가만히 서서 말리지를 않느냐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건개들끼리 노는 거지 싸우는 게 아니다 했다 그러자 그가 세상 어느 개가 이렇게 노느냐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선 더 설명해 봐야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알겠다고 하고 그냥 목줄을 챙겨 놀이터를 나왔다. 밖에 나가 한참 줄 산책을 하고 오니 다른 친구들도 나처럼 다 쫓겨났는지. 어쩐 건지 그분 혼자 아무도 없는 개 놀이터에서 자기 개를 오도카니 탁자에 앉혀두고 비눗방울을 개한테 불어주며 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 개한테 “좋지? 어때 예쁘지?” 하며 물었는데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개는 모르겠지만 비눗방울을 부는 사람만큼은 확실히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친한 훈련사 말도 그렇고 내 생각에도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자주 보이는 문제견의 보호자들은 전부 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개를 인간처럼 대하다 일을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반려견을 극진히 대하는 건 좋은데 가끔은 그 사랑이 과연 개 입장에서도 좋을까 싶을 때가 더러 있다. 사람도 사람으로 존중받을 때 행복하듯 개 역시 마찬가지다. 개를 개로서 존중해 주는 것은 사랑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이를 폴란드 시인 바스바와의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자두 속에 씨앗이 있듯 살아 숨쉬는 우리 모두에겐 각자 고유한 영혼이 있다. 그러니 설령 상대가 미물이라 할 지라도 우리 모두 각기 다른 저 마다의 씨앗을 서로 지켜주자.


또 마지막으로 중요한 건 개와 사람 사이도 적당한 시공간의 거리 유지다. 이는 복주와 해탈이를 키우며 알게 된 사실인데 인간에게도 자기만의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듯 개 역시 마찬가지다. 개도 혼자 편히 잘 쉬어야 함께 잘 어울린다. 그러니 개에게도 분명 어느 누구의 간섭도 없는 버지니아 울프식의 ‘자기만의 방’은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곳이 침대 밑이든 캔넬이든 상관없다. 이들이 쉬는 공간이 그 누구의 침범이 없는 절대 불가침의 영역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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