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들의 연대
말이라는 친구는 지구 누나가 (지인) 지난해 구조한 개인데, 구조과정 중 임보처에서 잃어버린 친구다. 언제나 그렇듯 사고는 여러 상황적 조합이 맞아떨어져야 일어 나는 법, 하필 임보자가 초보였고, 하필 대전에서 서울로 지역을 옮겼는데, 하필 말이가 대담한 친구라 그 사이 탈출해 버린 것이다.
말이는 원래 떠돌이 친구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염소라는 까만색 부인과 길에서 살림을 차려 사람들 눈에 띄었다. 여러 구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말이는 사회성도 좋고 애교가 많으며 머리도 비상한 친구라 한다. 심지어 처자식을 잘 돌보고 육아도 잘하는 다정한 아빠였다고 한다. 전엔 나도 몰랐는데 떠돌이 개는 무조건 성격이 좋아야 한단다. 안 그러면 보호소로 금세 잡혀간다고, 그러고 보니 아무한테나 이빨을 드러내도 안 되고 경계가 심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어도 굶어 죽기 딱 좋으니 과연 걸식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당시 말이를 구조하게 된 계기는 말이의 아내인 염소가 출산을 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어린것들이 길에서 살며 병에 걸릴까 걱정된 사람들이 구조를 결심했고, 그렇게 말이네 가족 전체를 구조하게 된 것이다. 이후 말이네 가족은 동시에 전부 구조되어 입양 가족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단 구조 당일 실종된 말이만 빼고.
한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말이의 탈출은 말이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일이다. 사실 구조라는 건 철저하게 인간 입장에서 개를 돕는 일이지 개 입장선 그저 포획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들이닥쳐 가족들을 모조리 잡아다 케이지에 잡아넣고 각기 다른 장소로 뿔뿔이 사라지는 상황이라니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게다가 말이의 경우는 물도 땅도 설은 낯선 서울로 옮겨졌고 소독약 냄새가 풀풀 나는 병원에 가 털까지 빡빡 밀렸다. 이만저만 두려운 상황이 아니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라도 도망갈 수밖에.
차라리 말이를 대전에서 잃어버렸다면 일이 조금 쉬웠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말이를 서울에서 잃어버렸다는 데 있었다. 여기서부터 일이 상당히 복잡해졌다. 게다가 말이 자체가 체격이 작고 특징이 적어 사람 눈에 잘 안 띄는 친구다. 만약 말이가 우리 해탈이 처럼 크고 무섭게 생긴 친구였다면 동네 사람들이 즉시 관공서에 신고했으리라. 하지만 말이 같이 무해해 보이는 작은 개는 혼자 돌아다녀도 사람들이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니 말이를 찾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말이를 잃어버린 후 한 달가량 대전 친구들 중심으로 말이 찾기 프로젝트가 진행 됐다. 이들은 매주 대전과 서울을 오가며 실종된 말이를 찾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전단지와 현수막을 제작해 붙이고 전문 업체를 수소문해 밤에는 열화상 드론까지 날렸다. 또 지역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잃어버린 개를 찾는다는 제보 글도 꾸준히 올렸다.
사실 이때만 해도 나는 이 일에서 한 발 떨어져 있었다. 말로는 언제든 도와줄 일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고 했지만 솔직히 잃어버린 말이 찾는 일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왜냐면 이건 확률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대전 개가 서울서 사라졌는데 대체 그 행방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쫓는다는 말인가.
한데 말이다. 한 달쯤 지났을까 어느 날 갑자기 화곡동 당근마켓에서 말이를 봤다는 제보가 한 건 들어왔다. 제보 사진 속 어슴프레 잡힌 개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말이었다. 그러자 다들 말이 찾기를 돕겠다며 너나없이 오픈채팅 방으로 몰려들었다. 그 기세에 나도 합류했다. 화곡동이라면 집에서 가깝기도 하거니와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더 이상 모른 척하고 있기 힘들었다. 게다가 나는 한 신문사 칼럼에 개에 관해 글도 쓰고 있지 않은가. 제대로는 아닐지언정 돕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말이 찾기 대열에 합류해 잠자코 대화방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자니 뭔가 느낌이 어색했다. 나보다 평균 스무 살은 어린 친구들이 근거 없는 희망에 들떠 한 마디씩 하는 게 낯설었다고나 할까. 다들 앞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구역을 나누어 말이를 찾을지 방향성을 논의하는 게 아니라. 말이를 찾으면 뭐부터 할 건지 얘기하느라 바빴다. 누구는 말이를 찾으면 정신없이 뽀뽀할 거다. 누구는 아마 자기는 말이를 보자마자 울 거 같다고 하고. 음..... 순간 나는 이마를 짚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도 그럴게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습관적으로 “낙관”을 경계하는 사람이다. 노상 기대와 희망이 어긋나고 빗나가는 생을 살아왔기에 수 없이 많은 날을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으려면 차라리 이쪽이 나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은 나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말하자면 꿈처럼 달콤한 독극물을 수시로 마셨다고나 할까. 고작 우리가 잡은 단서라고는 말이로 추정되는(중요) 사진 한 장이 전부인데 다들 오늘 당장 말이를 찾은 듯 행동했으니 말이다. 해서 이들의 한껏 달뜬 긍정이 실로 걱정되기까지 했다. 저러다 못 찾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싶어서.
일단 채팅방에선 말이가 나타난 쪽을 중심에서 구역을 나눠 지속적으로 전단작업을 하자는 얘기가 나왔고 최대한 빠르게 많은 곳에 전단지를 붙여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데 하필 ‘또 그날 전단지를 넉넉하게 갖고 있는 건 나 밖에 없었다. (당연하다. 여태 태업한 건 나밖에 없으니까)
하는 수 없이 나는 한 여름 화곡역에서 말이 얼굴이 새겨진 전단지를 품에 안고 약속 시간에 맞춰 하나 둘 도착하는 친구들에게 전단지를 골고루 나눠줬다. 한데 말이다 잠깐 이었지만 이들의 눈은 하나같이 희망에 가득 차 맑고 선량하게 빛났다. 그 또한 참으로 신기했다. 속으로 사람이 어떻게 사람 눈이 이럴 수 있지 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전단지만 주고받기 뭐 해 어디서 왔느냐 짤막하게 물으니 누구는 성남에서 왔다고 하고 누구는 부천에서 왔다고 한다. 다들 학교 끝나고 회사 마치고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온 거라고 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나로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마음이었다. 고작 남이 잃어버린 “개”를 찾아 주기 위해 그 귀한 시간을 내 이 멀리 까지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들은 좀처럼 질척이지 않았다. 우리 때처럼 끝나고 맥주 한 잔 하자는 둥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떠한 칭찬도 보상도 바라지 않았다.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신속하게 전단지를 받아 들더니 각자 할 일을 마치고 잽싸게 사라졌다. 이 점도 특이했다. 그런데 뭔가 그 상황이 묘하게 마음 편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때 나타났던 개는 말이를 닮은 다른 개였다 고로 말이는 아직 실종 상태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오픈 채팅방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어르신들 말씀이 사람이 처신만 잘하면 절간에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 하지 않는가 이 말이 개라고 다를까 싶다. 다들 하는 말이 말이는 능구렁이같이 처신을 기 막히게 한다 하니 어느 하늘 밑에서든 잘 살고 있겠지 믿고 있다. 그리고 이날 소녀들이 보여준 느슨하지만 공고한 연대는 내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한데 훗날 뜻밖에도 이들의 활약을 시공간이 전혀 다른 곳에서 또 한 번 보게 됐다. 그건 바로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 정국 이후 여의도 집회 현장에서였다. 그 긴박한 순간에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새하얀 입김이 후후 뿜어져 나오는 가운데 형형색색의 응원봉을 흔드는 소녀들의 외침을 보고 있자니 그때 화곡동에서 말이를 찾겠다며 굳은 의지로 내게 와 손을 내밀던 이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올랐다. 맞다 광장에 있던 젊은이들은 전부 또 다른 모습의 그녀들이었다.
혹자는 이들이 세월호에서 살아남고 이태원에서 살아남은 소녀들이라고 했다. 아니나 달라 이들의 태도는 분명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행동할 줄 알았다. 더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시위하는 도중에도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지켰다. 앞서가는 이가 뒤 따라오는 이에게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여기 단차 있어요 “라고 말하며 그들은 종일 걷고 뛰고 노래했다. 그렇게 여의도를 열흘이나 지켜 끝내탄핵을 가결로 이끌어 냈다. 아무도 죽지도 다치지도 않고 거리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며 이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꿨다. 경이로웠다.
순간 현장에서 이들을 보며 나는 한강 작가의 말처럼 죽은 자가 산자를 돕고 산자가 죽은 자를 불러내는 연결된 세계관 안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구한다는 생각을 했다. 덕분에 요즘 나는 이 친구들과 함께라면 앞으로 나 역시 이들처럼 세상을 ‘ 긍정 ’ 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시위 현장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따뜻한 물을 따라주며 “다음에는 우리 만나지 마요.” 하니까 이 친구들이 그런다. “아니에요. 우리 또 만나요. 그땐 꼭 좋은 일로 만나요”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내 이 말이 목에 걸려 자꾸만 울컥하고 눈물이 났다. 정말 그러고 싶어서.
* 참고로 말이 소식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그러니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이렇게 생긴 친구를 혹시라도 보셨다면 연락 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