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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무도 모른다.

by 산만언니

회사에서 일하는 내내 나한테는 메인 업무 외에도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이 많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어디 가서 저 요즘 이 일 하고 다닙니다. 말하기 힘든 일들 말이다. 하여 전에 누가 나한테 무슨 일 하느냐 물으면 " 그냥 인간 화개장터라고 보시면 됩니다. 있어야 할 일들 다 하고요. 없으면 없는 대로 또 다 합니다."라고 했다. 물론 웃으라고 한 말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몇 해 전에는 내게 그룹사 방문 고객에게 드릴 기념품 세트를 맞추라는 업무가 떨어졌다. 김영란법 실행 직후의 일이었다. 사실 고객용 선물을 30만 원도 아니고 3만 원 안에서 고르는 건,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그렇지 않은가, 명절도 아니고 아무 때나 식용유 나 스팸 선물 세트를 안겨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여 내게 주어진 미션은 정확히 말해 3만 원의 예산으로 30만 원의 가치가 있는 선물을 찾아오는 일이었다. 예컨대 소장 가치가 있는 한정판 사무용품 세트 같은 것들 말이다. 사실 이런 일이라면 자신 있었다. 평소에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이 무렵 밖으로 많이 돌았다.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까지 갔다. 국내에선 다른 회사들이 주로 어떤 제품들을 선물하는지 조사해 차별화 전략을 세웠고, 일본엔 아기자기한 패키지 디자인을 밴치 마킹하러 갔고, 중국에는 앞선 시장 자료조사를 참고해 선택한 모델을 직접 제작할 요량으로 갔다. ( 아마 이 일이 당시 사내에서 있었던, 내 근태 논란의 결정적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나는 중국의 항저우에 있는 이우시장에 갔다. 이우시장은 그 규모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파는 물건에서 규모까지 가히 압도 적이었다. 하여 평소엔 주로 출장을 혼자 다녔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이 현지 에이전시의 도움을 받았다. 규모가 큰 시장에서 언어까지 안되니 도저히 혼자서 뭘 어떻게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도움받을만한 업체를 알음알음 찾았고, 그렇게 항저우에서 판촉 업을 하는 한국분 사장님과 사모님을 만나게 됐다.


사실 처음에 사장님 내외분을 보고 속으로 적잖이 실망했다. 사장님은 못해도 나이 오십은 돼 보이는데, 사모님이라는 분이 고작해야 스물을 갓 넘긴 앳된 소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 둘의 나이 차이는 16살이었고, 사모님 나이가 서른이었는데 꽤나 동안이었다. ) 하여 이들과 일도 하기 전에 나는 내심 속으로 김이 먼저 빠졌더랬다. 일 좀 잘해보려고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 여기까지 왔는데, 도움받아야 할 업체 사람들이 어째 조선족 출신의 어린 여자애하고 또 그 여자랑 사는 중년의 한국 남자일까, 하는 편견 때문에


하지만 내 짐작은 당일 오후 보기 좋게 빗나갔다. 사장님께서 내가 여자라는 점을 배려 해 (이름이 중성적이어서 메일 주고받을 때는 남자인 줄 알았다고 했다) , 편하게 다니라고 당일에 갑자기 남자 직원 대신 사모님을 직접 가이드로 붙여주셨고,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사모님과 함께 일을 보러 다녔는데, 사모님이라 부르기에 앳된 그 친구는 정말이지 내가 살면서 만난 사람들 중 누구보다 영리하고 빠릿빠릿해 진짜로 못 해내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개미굴 같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우시장의 골목을 손바닥처럼 깨고 있는 그녀는 내가 원하는 물건과 가격을 얘기하면 길 한 번 헤매지 않고 목적지로 뚝딱 바로 안내했다. 그뿐인가,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내가 필요한 게 있을 것 같은 눈치만 보여도 알아서 먼저 척척 찾아다 줬다. 하여 나는 또 이 친구에게 또 덜컥 마음을 열고, 함께 다니는 내내 이런저런 속 얘기들을 나눴고, 그 바람에 이 친구가 자라온 소설 같은 얘기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 친구는 길림성, 그러니까 연변 출신이라고 했다. 또 연변의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 이웃에 누구네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아는 데서 컸다고 했다. 한데 그 동네에서 하필이면 이 친구네 집이 제일 가난했다고 한다. 그 집이 얼마나 가난했냐고 하면, 자전거 한 대만 있어도 금방 오고 갈 길을 한 평생 자전거 한 대 살 돈이 없어, 식구들이 어딜 가나 몇 시간이고 걸어 다녔다고 했다. 해서 그녀 역시 학교 다니는 동안에도 쉬는 시간이면 집에 와 병아리 밥 주고 다시 학교에 가고 점심시간에는 또 집으로 열심히 달려와 돼지밥 주고 다시 학교에 갔다고 한다. 또 그 움막 같은 집에선 겨울마다 너무 추워 두 볼이 벌겋게 얼어 터졌고, 그렇게 얼었던 얼굴은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녹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이날 이때까지 한 번도 가난했던 부모님을 탓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가난한 와중에도 이분들이 이 친구를 너무도 사랑하며 키웠기 때문이란다.


이 친구가 소학교 다닐 적에 그녀의 아버지는 매일같이 아이가 학교에 메고 갈 넥타이를 인두처럼 생긴 무쇠 다리미로 꾹꾹 눌러 빳빳하게 다려 주셨고, 그 힘든 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봄이 오면 잊지 않고 딸아이가 좋아하는 들꽃을 잔뜩 꺾어 오셨다고 했다. 하지만 이 친구의 아버지는 아이가 자라는 동안 불행히도 술에 계속 손을 대기 시작했고, 끝내는 알코올 중독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지긋지긋한 가난의 끝이 보이지 않으니 나중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단다.


하여 이 친구는 만으로 열여덟이 되던 해에 비자를 받자마자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남미로 가는 배를 얻어 타고 밀항을 해 현지 공장에 취직해 3년간 불법체류를 한 후 돈을 모아 연길로 다시 왔다고 한다. 그 돈으로 부모님께 작은 집 한 칸 마련해 드리려는 부푼 마음을 안고 말이다. 그런데 막상 집에 와 보니 아버지가 자리보전을 하고 계셨단다. 하여 그녀가 얼른 아버지를 도시의 병원으로 모시고 가 검사를 해 보니, 아버지께서는 이미 간암 말기였다고 한다. 아마 그간 돈이 없어 나쁜 술을 마셔서 기어이 건강을 해친 것 같다고 했다.


아무튼 이 친구는 그 더운 나라에서도 시원한 거 하나 안 사 먹고 꼬박 3년을 모은 돈을 전부 아버지 병원비로 겨울 한 철에 다 썬지만 끝끝내 아버지는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 일에 대해 하나도 서운한 게 없다고 한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자기가 못해 본 거 없이 해 줄 수 있어서, 그러니까 값비싼 영양제 같은 것도 망설이지 않고 전부 맞춰 줄 수 있었기에 아쉬운 게 없어 자기가 힘들게 번 돈을 다 썼대도 전혀 상관없다고 했다. 여기까지도 대단한데, 이 친구의 다음 말이 더 걸작이었다.


"북조선에서 태어나지 않은 게 어디예요. 북조선 여자들은요. 다들 목숨 걸고 중국으로 넘어와서 백 살이 다 된 늙은이나 깡패한테 팔려가 남몰래 맞아 죽거나 공안한테 잘못 걸려 그 자리에서 총 맞아 죽어요. 심지어 고난의 행군 겨울에는 길에서 얼어 죽는 사람도 되게 많았어요. "


그렇게 아버지 장례를 치른 그녀는 다시 일자리를 찾아 23살의 나이에 항저우로 와 취직을 했고,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한 거였다. 당시 마흔 줄의 남편은 서울에서 사업을 한 번 말아먹어 혼기를 놓치고, 중국에서 다시 재기를 하려던 중이었고, 그때 우연히 이 친구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도 낳고 기른 거였다. 처음엔 둘이 단칸방에서 시작했으나, 지금은 일도 집도 제법 불려 연길에 계시던 장모님까지 모시고 와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처음에 썼던 내 색안경이 무색하리만큼 행복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었던 거다.


아쉽게도, 이우시장에서 맞추려던 제작 상품은 당초 기대했던 품질이 나오지 않거나, 초도 주문 수량이 맞지 않아 제작을 포기해야 했다. 해서 그 후로 나는 이 친구를 다시 보지 못했지만, 이 출장을 통해 나는 많은 걸 깨달았다. 내가 만약 그 친구처럼 연길에서 태어났다면 과연 그녀만큼 잘 클 수 있었을까, 그도 아니라 그녀 말대로 내가 진짜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한 얘기로, 난 정말이지 자신 없다.


그렇다면 나 따위가 뭐라고 그 대단한 친구를 처음에 우습게 봤냐는 거다. 나보다 몇 십배는 강하고 멋진 그녀를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는 오래도록 혼자 있어도 부끄러운 날들을 보내야 했다.


게다가 나는 한 평생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한테 자기들 멋대로 꼬리표를 달고, 라벨링을 한다고 난리를 쳐대고 살았으면서, 어느새 나 역시 속으로 사람들을 멋대로 분류하고 있었던 거였다. 아차 싶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그녀의 꿈을 응원한다. 지금은 잘 밤에 아이들 재우고 한국에서 만드는 막장드라마 보면서 자기네 집 가난하다고 무시하고 괴롭혔던 고향 사람들한테 대리 복수하는 쾌감을 느낀다는 그녀가, 언젠가는 진짜로 그녀 말대로 고향에 가 번듯한 이층 집 지어 올리고 예쁜 정원을 가꾸며 사는 꿈을 이 루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나 또한 그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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