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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해 먹기와 독립만세

by 제이

구순을 훌쩍 넘기신 친정 부모님.
근처에 남동생네들이 살긴 하나 항상 마음이 쓰인다.
전화 올 때마다 긴장.

아직도 매일 왕복 사오십분 거리의 게이트볼장을 나가시는 아버지.
시즌마다 경기까지 참석하신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전화하셨다.
"너네 엄마가 밥을 안 해 준다.
계속 잠만 자다가 깨서는 배고프다네."
억울한 목소리.
쌀 씻어 전기밥솥에 안치면 되는 밥.
가까이 사는 아들들이 계속 국을 가져다 드린다.
그럼 당신이 챙겨 잡수시면 될 텐데.
아버지는 구순 넘은 늙은 마나님이 밥상을 차려주길 원하셨다.

우리는 학교에서 많은 걸 배운다.
언어, 수리, 과학...
그런데 진짜 필요한 것들은 왜 안 배울까? 적어도 생존에 관한 것들.
생존 수영, 인공호흡법,
그리고 최소한의 음식 준비.

젊어서부터 위가 약하셨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께 한평생 하루 세끼 각종 죽을 차려주신 어머니.
그런데 구순이 넘어 치매가 시작되고 이젠 때마다 식사를 못 차리시는 어머니랑 황혼이혼이라도 하실 판이시다.

칠순 넘은 우리 집 경상도 남자는 어떤가?
유일한 요리는 엉성한 계란프라이와 라면.
"행여 나 없으면 당신이 직접 밥 차려 드셔야지요. 이런저런 요리할 때 곁에서 눈여겨보세요."
부인의 성화에도 도망친다.
"나 먼저 세상 떠나면 당신 영양실조로 몇 달 못가 나 따라올 거야"
부인의 악담에
부인이 없으면 알아서 챙길 거란다.
슈퍼 가면 즉석음식이 천지란다.
요리조리 도망.

얼마 전 티브이에서 본 구순 넘은 노인 부부 이야기.
병들어 누운 마나님이 스스로 밥 차려 먹지 못하는 영감님을 걱정걱정.

학교 교과목에 '생존 요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이혼할 판이고
남편은 나 죽으면 따라 죽을 판이니.

일식이, 이식이, 삼식이.
퇴직 후 거실을 점령한 구시대 남편의 하루 식사 수.
남편 식사 챙기느라 예전처럼 자유롭게 외출 못하는 부인의 원망과 셀프 식사 준비를 못 하시는 남편의 눈치가 섞인 신조어.

역시 손수 식사 준비를 못 하는 한 영감님이 계셨다.
직장을 아직 나갈 때는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에게 부인은 당연히 밥상을 차려주었다.
영감님이 퇴직하고 집에 갇히니 밥 얻어먹기가 눈치가 보였다.
그런데 어떡하랴, 할 줄 아는 요리가 없는데... 라면도 한두 번이지.
어느 날, 구청에서 노인들을 위한 요리교실을 한단다.
요리교실을 나가시면서 영감님 솜씨는 일취월장.
이젠 저녁이 되어도 밥 차려줄 부인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본인이 멋진 파스타를 만들어 부인에게 대접도 하게 되었다.
이젠 부인이 남편 눈치를 보게 될 판.
대한독립만세다.

*독립
다른 것에 예속하거나 의존하지 아니하는 상태가 됨



'기대지 마시오'
기대지 말아야 할 것이 어찌
엘리베이터뿐이랴.
나이 들면서 체력이 달리고 마음도 약해지니 자연 기대고 싶어지는 게 많아진다.

그러나 독립만세다.
독립하려면 기대지 말아야 한다.
힘을 기려야 한다.
경제적으로도 독립.
걱정, 불안, 분노, 서운함으로 널뛰는 내 마음에 휘둘리지 않는 감정적 독립.
그리고
마나님 눈치 안 봐도 되는 취사의 독립.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은모래 밭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아빠 오빠가 아니고 왜 엄마 누나인가?
그녀들은 취사에 능하니.

예전 남자들과는 달리 요즘 젊은 남자들은 부엌에 드나드는 일이 자연스럽다.
사위가 설거지는 물론 딸 생일 아침
미역국 밥상까지 차려주고 출근한다니 놀랍고 부럽다.
격세지감.
어디서나 척척 밥상을 차려내는 '삼시 세끼'의 차승원 씨는 리얼 독립인이다.

광복 80주년은 외치에서 벗어난 나라의 독립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둠에서의 영혼의 독립이고
영감님의 내 밥 해 먹기는 마나님으로부터 독립이다.

대한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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