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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Oct 10. 2024

감이 익을 무렵

가을이다!


무지 더웠던 지난 2016년 여름.
끝날지 않을 것 같은  무더위.
그러나 가을은 어느 날 갑자기 왔다.
하루 일교차가 10도를 오르내리니 낮에는 에어컨, 새벽에는 히터를 틀어야 한다.

머리로  "환절기 인가" 했는데
몸은 훨씬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여름인가 가을인가 생각하는 사이 몸은 "가을인데요." 한다.
새벽에 일어나면 콧물이 줄줄, 느닷없는 재채기, 아픈 목.
저녁에는 진땀.
한동안 병원을 다니며 그렇게 가을을 시작했다.

아들은 한수 더 뜬다.
콧물 기침에 묽은 변에 진땀.
행여 십여 년 전 앓았던 결핵성 장염이 걱정되어 치료받던 대학병원을 찾아가 종합 검사를 했더니 괜찮단다.
애는 약을 먹으나 계속 힘들어한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애 방에서 신음 소리가 나서 가봤더니 애는 혼수상태.
119차를 타고 병원 응급실에 도착할 즈음 다행히 아들은 의식이 돌아왔다.
뇌파, MRI 검사 등을 했으나 뇌는 별 이상이 없단다.
그런데...
가을에 모자의 건강이, 생활의 질이 그랬다.

더욱이
치매가 온 구순 넘으신 어머님은 그 나이에도 구순이 훌쩍 넘으신 아버지와 티격태격하시니 그 또한 신경이 쓰인다.
힘든 가을...

새벽.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힘들지?
그래서 지난주 너에게 보낸 선물 잘 받았지? 힘내라,  건강해라."
선물?
아하, 그곳?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예쁜 레스토랑.
이십여 년 동안 이런저런 지인들과 그곳을 들락거렸는데 최근에는 봄 가을로 방문한다.
오륙십 대 나이의 여주인은 두건을 쓰시고 예쁜 에프런을 두른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복장을 하셨다.
그 이층 건물은  천정까지 온 내부가 무슨 유럽 건물인 양 아름다운 그림으로 채색되어 있다.
여기저기 무심히 놓인 감성적인 장식품들이 여인들의 마음을 홀라당 빼앗는다.

압권은 식당의 위치.
사과 과수원과 감 과수원 사이의 좁은 오솔길로만 들어갈 수 있다.
봄에는 하얀 사과꽃이 꿈결같이 피어나고
가을에는 울타리 너머 삐져나온 주렁주렁  과일 가지가 손 뻗으면 닿는다.
식당 테라스에서 내려다보이는 주위의 과수원.
봄에는 지천으로  피는 하얀 사과꽃.
가을에는 주렁주렁 달린  빨간 사과와 감.
그리고 테라스 앞의 호수.
드넓은 호수 옆에는 하얀 억새밭이 펼쳐져 있다.
억새밭 사잇길 위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
밤에는 그 호수 위 너른 풍경 위로 별이 쏟아진단다...
감성으로 시작해서 감성으로 끝나는 그곳.

음식은 어떤가?
푸짐하고도 정갈하다.
알프스 '늙은 소녀' 여주인이 직접 준비한 음식과곁들인 꽃.
후식의 커피잔 한편에도 무심히 얹힌 꽃 덩굴.

가깝지는 않으나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특히 가을의 그곳 나들이.
운이 좋으면 동네 할머니들이 길가에 주섬주섬 펼쳐놓은 과일들을  무더기로 살수 있고 늙은 호박까지 사가지고 와 방 한편  가을 인테리어로 쓴다.
호수, 억세밭의 가을 풍광.
무슨 중세 프랑스 식당 같은 인테리어.
입과 눈이 즐거운 음식.
충분하다....

그날, 우리가 갔을 때는 +알파.
그러니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지.

많은 때는 하루 백 명 손님까지 온다는 그곳에 그 가을날, 우리 가족이 점심시간이 좀 지나서 도착했을 때는 커피만 마시러 온 예닐곱 명의 손님들 만 있었는데 조금 후 우르르 나갔다.
어쩌다가 우리 세 식구가 식당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가을꽃과 덩굴로 장식된  따끈따끈하고 맛난 음식이 차려졌다.
음식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스피커에서 시 낭송이 들린다.
아이고,
그건 우리 세 식구를 위해 여주인이 그 자리에서 작시한 것.
   '인생길이 굽이굽이 힘들어도
   우리주께서 지켜주신다
   축복하신다....'

시 낭송을 마친 여주인은 박수 치는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즉흥 자작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름답구나
   행복하구나
   감사하구나...'

식사를 마치고 아들은 후식으로 나온 주스를 마시며 스마트폰을 보고
남편과 나는 커피를 들고  테라스에 놓인 그네로 갔다.
흔들리는 그네에 앉았다.
드넓은 호수 곁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참 좋네..."
내 말에 남편이 말했다.
"우리 세 가족이 다 있으니 좋지.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좋을까?"

뒤돌아 보면 순간순간이 다 그리운 시간이지만
그래
이 순간도 우리 인생의 정점이다.
모든 이들이 열심히 살아 마침내 가지고 싶은 순간들이 바로 이런 순간이 아닌지.

계산을 마치고 식당 문을 나서는 나에게 여주인이 노랗게 익은 감 서너 개를 손에 쥐어주신다.

사는 게 때로는 힘들다.
그러나 잘 찾아보면 그런 때에도 하나님의 선물이 도처에 있다.
감이 익을 무렵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보물 찾기하러
나는 그곳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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