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을이다.
70년대 이맘때의 늦가을.
대학 졸업반이었다.
교생실습도 진작 끝나고 졸업여행도 다녀온 학과는 거진 파장 분위기.
요즘은 졸업 전, 임용교시 준비로 바쁠 때지만 그때는 국립사범대 졸업하면 100% 자동 발령받던 시절.
어느 날, 과 친구 네댓 명이 청량산으로 가을여행을 간단다.
이런저런 일로 나는 못 가네 하면서 시외 주차장으로 그들을 배웅하러 갔다가 어떻게 합류하게 되었다.
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채 아무런 준비물도 없이.
청량산의 가을은 아름다웠다.
비가 간간이 왔지만 물기 머금은 가을 산의 독특한 정취가 또 있었다.
흑백사진 시절이었지만 그때 사진을 보면 그 가을의 울긋불긋 단풍이 눈에 선하다.
세상에 이렇게 단풍이 아름답다니.
이제껏 여학교 시절은 입시 준비로, 대학시절은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로 헐레벌떡 산다고 가을을 몰랐구나.
하긴 모두가 가난했던 60~70년대 그 시절엔 여행이란 수학여행이 고작이었다.
오롯이 계절을 만끽하려고 떠난 여행은 생애 처음이구나.
청량산 이곳을 오지 않았다면 나는 제대로 가을을 모를 뻔했지.
그 근처 학교에 재직 중인 선배를 찾아가 찬조금을 받아 여행비로 보태 쓰기도 했다.
하루는 비구니 사찰에서 잤는데 한밤중에 바깥의 화장실로 간다고 마당에 나섰더니 산속의 칠흑 같은 어두움.
다시 돌아온 교정.
그런데 캠퍼스 숲이 단풍으로 울긋불긋한 게 아닌가.
나는 단풍을 보러 저 멀리 갔다 왔는데 이곳도 나름 괜찮네.
가까이 있어서, 매일 무심히 스쳐보느라 진가를 몰랐구나.
하긴 캠퍼스의 숲이 아름다워
어린이들이 소풍도 온다.
결혼 후, 남편의 전근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살았던 곳은 넓은 잔디 사이사이에 2층 타운하우스들이 있고
3층 아파트들이 널찍이 있는 이국적인 곳이었다.
이사 온 곳은 시장이 근처에 있어 번잡하기도 하려니와 5층 아파트 몇 채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정들었던 그곳을 떠나 이곳 이웃을 아직 사귀지도 못하는 사이 나는 건강이 나빠졌다.
원인 모를 복통과 장출혈 그리고 어느 날 실신.
거진 반년 간의 입원으로 그 집은 낮에는 텅 비었고 밤에는 오직 남편의 숙소로 쓰였다.
어린아이 둘은 멀리 외갓집으로 보내졌고 남편은 퇴근 후 내 입원실에서 저녁을 보내고 늦게사 귀가했으니.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 전셋집. 이 동네.
결국 입원 중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하고 마침 분양 중인 아파트로 이사 가기로 했다.
퇴원하고 이사 가는 전날.
그때는 익스프레스 이사 서비스가 없던 시절.
동네 가게에서 틈틈이 모은 라면박스로 분주하게 이삿짐을 싸다 보니 어연 늦은 오후가 되었다.
서쪽에 면한 딸아이 방.
장난감이랑 책 등을 정리하다가 문득 창밖을 보니 하늘이 온통 아름다운 붉은 노을이다.
아니,
우리 집이 이런 뷰를 가졌었나?
그동안 왜 나는 이걸 몰랐지?
생각해 보니 이 집도 나름 괜찮았네.
시장이 가까워 장 보기도 좋고 가까운 곳에 책방도, 미장원도, 고속 터미널도 있었는데.
가끔씩 창밖 너머 들리는 이웃집 남자분의 통성기도 소리도 은혜로웠는데.
뒤늦게 입학한 딸아이 유치원도 나름 명문이었는데.
앞집에 딸 또래 친구도 있었는데.
늦게사...
too late.
191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벨기에 작가 마테를링크.
그가 쓴 동화 '파랑새'.
틸틸과 메틸 남매는 어느 성탄절 이브에 요술쟁이 할머니의 부탁을 받는다.
아픈 자기의 딸이 파랑새를 갖고 싶어 하니 한 마리 찾아 달라는 것
두 남매는 추억의 나라, 밤의 궁전, 숲 속, 공동묘지, 행복의 정원을 거쳐
미래의 나라를 방문한다.
곳곳에서 파랑새를 발견하나 그곳을 떠날 때는 새는 죽어 있거나 날아가 버린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난다.
그런데, 자기 집에서 키우는 비둘기가 바로 그 파랑새였다.
그렇게 찾던 것이 바로 옆에 있는 줄 모르고 헤매었구나.
조금만 다른 눈으로 보면 볼 수 있었는데 평범한 것이라 허투루 보아 몰랐구나.
시인 구상 선생님은 그래서 이 시를 쓰셨나 보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자리가 꽃 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 자리니라
앉은자리가 꽃 자리니라
앉은자리가 꽃 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 자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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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의 '꽃자리'중>
유토피아는 없다.
Utopia is Nowhere
유토피아는 지금 여기.
Utopia is Now Here.
<꽃자리>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자리가 꽃 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 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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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